[한일비전포럼 출판기념회]미래로 과거 푸는 역발상···한·일 2025년까지 역사 화해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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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관계는 지난 8년간 누적된 ‘복합 다중 골절’ 상태의 어려움에 빠져있습니다. 하지만 어둠이 깊으면 새벽이 옵니다. 터널의 출구가 가깝다고 믿습니다.”(신각수 전 주일대사)
2018년 10월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 이후 출구 없는 ‘아포리아(aporiaㆍ난제)’ 상태에 빠진 한·일 관계를 풀기 위해 국내 전문가들이 지난 1년간 머리를 맞댄 결과가 책으로 나왔다.
재단법인 한반도평화만들기(이사장 홍석현) 산하 싱크탱크인 한·일비전포럼의 신간 ‘갈등에 휩싸인 한·일 관계: 현안, 리스크, 대응’ 출판 기념회가 19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열렸다.
한·일비전포럼은 일본의 수출규제와 한국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약(GSOMIA) 종료 결정 유예 등 정치·경제·안보 분야 등 전방위로 확대되고 있는 양국 갈등을 풀어가기 위한 해법을 찾기 위해 마련됐다. 이번 신간은 지난해 4월부터 올해 9월까지 19차례에 걸쳐 진행된 포럼의 결과를 집대성한 것이다.
이날 기념회에는 이홍구 전 국무총리와 유명환·송민순·윤영관·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 도미타 고지(冨田浩司) 주한 일본대사, 서주석 청와대 국가안보실 1차장 등 전·현직 정부 관계자와 외교 전문가, 기업인 등 약 60명이 참석했다.
한·일비전포럼 위원장을 맡은 신각수 전 대사는 인사말에서“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신행정부가 일본에서 출범한 만큼 기회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간사를 맡은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일비전포럼의 신간은 민간에서 격론을 거쳐 한·일 관계의 해법을 모색한 집단지성의 결과”라고 소개했다.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이날 축사를 통해 “한·일비전포럼의 폭넓은 지혜와 통찰력은 더 나은 양국 관계를 위해 정부에도 큰 힘이 되고 있다”며 “포럼의 역할과 활동 공간이 넓어질 수 있도록 정부 차원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축사는 서 실장이 최근 방미 후 코로나19 자가 격리 중이어서 서주석 안보실 1차장이 대독했다.
일본 측을 대표해 참석한 도미타 일본대사는 “스가 정권 출범 이후 처음으로 서한을 통해 양국 정상이 ‘대화를 통한 현안 해결’을 확인한 것은 중요하다”며 “긍정적인 '계기'들을 '진전'으로 연결시켜야 하며, 스가 총리께서도 결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는 “한·일비전포럼의 중요한 키워드는 평화”라며 “과거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동양의 평화가 있어야 한국의 평화도 있다. 한반도의 평화가 동양의 평화’라는 정신을 담고 있다”고 조언했다.
이날 행사에서 홍석현 이사장은 ‘한·일 관계 발전을 위한 제안’ 연설을 통해 “한·일 양국은 역사에서 교훈을 얻되 역사의 노예가 돼서는 결코 안 된다”고 호소했다. 홍 이사장은 “(현재 상황에서) 단 하나의 갈등 요인이라도 추가되면 낙타의 등을 부러뜨리는 마지막 지푸라기가 될 수 있다”며 “정치는 국경선에서 멈춰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올 연말로 예정된 한·중·일 정상회의는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한 중대한 전기”라며 “스가 신임 총리가 방한하지 않으면 한국 내 문제 해결 분위기를 경색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스가 총리의 방한을 위해 한국이 특별 입법을 통해 강제징용 문제와 관련한 해법을 제시할 것을 제안했다.
홍 이사장은 구체적인 해법으로 “한국은 일본을 압박하지 말고 우리 정부와 기업이 (강제징용 문제를)해결하자”며 “한국이 배상 조치를 취하면, 한국이 일본에 끌려다니지 않고 도덕적 우위에 설 수 있다”고 강조했다. 대신 “일본 정부는 불법적 식민지배와 강제징용에 대해 사과하고 반성하는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바람직한 양국의 미래 관계에 대해 그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60주년인 2025년을 목표로 한·일이 ‘역사 화해 프로세스’에 돌입할 것을 제안한다”며 “미래를 통해 과거를 정리한다는 역발상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어 “과거 세 번에 걸쳐 큰 전쟁을 했던 독일과 프랑스는 1963년 콘라드 아데나워 수상과 샤를 드골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으로 엘리제 조약(독ㆍ프 우호 조약)을 맺은 것처럼 두 나라가 ‘한·일판 엘리제 조약’을 체결할 것”도 제안했다.
홍 이사장은 또 유럽 통합이 석탄ㆍ철강 공동체에서 시작했음을 지적하면서 한·일이 동북아 수퍼그리드 구축에서 손을 잡을 수 있다고도 했다. 구자열 LS그룹 회장도 “전기는 에너지이고 사람으로 치면 혈관”이라며 “동북아 수퍼그리드로 되면(전력망을 구축하면) 한ㆍ일ㆍ중ㆍ러가 합쳐져 서로 피가 통하게 되는 것이고, 자연히 동북아 평화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행사에서는 한·일 정부와 의회 관계자들의 축사와 다양한 아이디어 제안도 이어졌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축사를 통해 “전대미문의 신종 코로나 위기 상황에서 양국 기업의 경제 협력과 젊은 세대의 인적 교류는 매우 중요하다”며 “정부 노력과 함께 민간의 지혜로운 분들이 힘을 모아달라”고 당부했다. 박병석 국회의장은 “‘(한·일 간) 상호 의존성을 무기화하는 것은 문명국가의 수치’라는 홍 이사장 생각에 동의한다”며 “국회도 초당적으로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가와무라 다케오(河村建夫) 일·한 친선협회장(중의원 의원)은 “1998년 ‘김대중 대통령-오부치 게이조 총리 선언’으로 진전되던 양국 관계가 정체돼 매우 유감스럽다”며 “차세대, 특히 청소년 교류의 폭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일본 총리는 “일본 측 타협안의 기본은 ‘패전국은 피해자들이 더이상 사죄할 필요가 없다고 할 때까지 사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무한책임론에 있다고 믿는다”고 밝혔다. 스기타 료키(杉田亮毅) 전 니혼게이자이신문 회장은 “‘일본에 배상을 요구하지 말고 한국 정부와 기업이 해결하자’는 제안은 한국 내 분위기에서 큰 용기가 필요한 발언”이라고 높게 평가했다.
한·일 지식인들은 미래 국익 차원에서 한·일 간 전략적 협력의 중요성에 대해 한목소리를 냈다. 오코노기 마사오(小此木政夫) 일본 게이오대 교수는 “한·일 정부 역사 논쟁의 배경에는 이념 과잉이 있지만, 스가 총리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로 현세 이익 추구형”이라며 “미·중이 체제 경쟁을 하는 신냉전 시대에 선진 공업국가인 한·일은 ‘미들 파워의 전략적 연계’를 모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아사바 유키(淺羽祐樹) 도시샤대 교수는 “우리가 한·일관계의 비전이나 전략을 제시할 때 빠뜨리면 안 되는 것은 젊은이들, 여성들, 지방에 사는 사람들 즉, 다양성”이라고 강조했다. 후카가와 유키고(深川由起子) 와세다대 교수도 “세계무역기구(WTO) 무역질서가 흔들리는 글로벌 체제에서 한국이 자기방어를 위해 감정과 민족주의를 배제하고 국익론을 선택하는 것은 필수”라고 조언했다.
“젊은 세대의 교류를 정치의 파도가 쓸어가도록 해선 안 된다”는 지적도 나왔다. 도시샤대 4학년에 재학 중인 다이토 치사토는 “현재의 양국 관계에는 젊은 세대의 목소리가 반영돼 있지 않다”며 “다시 빨리 한국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한·일비전포럼=재단법인 한반도평화만들기(이사장 홍석현) 산하의 일본·외교 문제 싱크탱크. 한·일 관계 개선이 장기적으로 남북문제 해결과 동북아 평화 정착에 도움이 된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전직 외교관ㆍ경제계ㆍ학계ㆍ언론계 인사들이 전방위로 경색된 한·일 관계를 풀어나갈 수 있는 실질적이고 전략적인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 지난해 출범했다. 지난해 4월부터 한 달에 한 번꼴로 조찬 토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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