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비전 포럼] 격분은 그만…8·15 경축사 활용 대화공간 넓혀가야
본문
양국 지도자 ‘레토릭’ 순화 필요
일왕 즉위 축하사절단 보내야
정부·민간은 역할 분리해 대응
주력산업 핵심부품 국산화 계기로
경색된 한·일 관계의 출구를 찾고 바람직한 미래상을 모색하는 ‘한일 비전 포럼’ 9차 모임이 7일 열렸다(그동안 두 차례는 비공개). 일본의 화이트리스트(수출심사 우대국) 배제 발표로 양국 관계가 ‘강대강’ 국면으로 치닫는 가운데 이날 모임에선 “격앙된 분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선 먼저 양국 지도자가 공격적 언행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에 앞서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상근자문위원(사진)이 ‘일본의 무역보복이 미칠 향방과 파장’을 주제로 냉엄한 현실을 진단했다. 참석자들은 정경분리 대응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정부와 민간은 서로 역할을 분리하는 것이 사태를 풀어나가는 여지를 만들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독일의 히든챔피언처럼 특정 기업에 종속되지 않고 국경을 넘어 여러 기업에 소재·부품을 공급하는 강소기업 육성에도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의견도 공감을 얻었다.
일본은 반도체·디스플레이 관련 3개 소재의 수출규제 강화 조치를 시행하면서 해당 품목에 대한 무역허가 업무를 경제산업성 본부 안전보장 무역심사과로 이관했다. 그만큼 심사를 더욱 엄격히 하겠다는 것으로, 경우에 따라선 허가를 내주지 않을 수도 있다.
경산성은 아예 ‘화이트리스트’라는 명칭을 폐지하고 분류 대상을 A·B·C·D로 개편했다. 기존 화이트리스트가 A그룹이라서 한국은 B그룹으로 떨어졌다. 이로써 한국은 ‘캐치올 규제’(안보상 수출규제)를 받게 됐다. 그래도 B그룹은 수출관리가 일정하게 이뤄지는 국가로 분류돼 포괄허가를 받을 수 있는 품목이 많을 것으로 예상한다.
문제는 화이트리스트에서 빠지고 캐치올 규제를 받게 되면서 경산성이 군사 전용 가능성을 이유로 나사·베어링 등 어떤 품목이라도 지정만 하면 언제든 규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일본 정부의 재량권, 다시 말해 한국이 말을 듣지 않을 때 채찍질할 수 있는 수단이 생겼다는 의미다. 다만 이런 수단은 일본 정부가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아래에선 상당히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재량권을 함부로 행사하지 못하도록 압박하는 것이 중요한 때다.
일본의 수출규제 강화는 비단 물품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설계도나 기술 지도·협의 등 기술적 부분도 규제 대상에 포함된다. 일본 내에서 기술을 전수받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어 여러 현장에서 어려움이 발생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지난 3월 12일 아소 다로(麻生太郎) 재무상이 국회 답변을 통해 한국 보복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그 내용은 관세 부과, 송금 정지, 비자 정지 등이다.
일본계 은행의 한국에 대한 여신 규모는 586억 달러 정도로 크지 않지만 기업에 집중돼 있다는 점에서 우려된다. 글로벌 금융 경기가 얼어붙는 가운데 일본 자금이 빠져나가면 컨소시엄 형태로 들어온 미국·유럽 자본의 이탈까지 초래하는 심각한 상황을 맞을 수 있다.
일본이 여행비자 제한 조치는 취할 가능성이 작지만 청년층의 취업비자 제한은 한국을 압박할 수 있는 카드로 거론된다. 한국이 맞대응 차원에서 일본을 화이트국가에서 배제하려면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WTO 등 국제무대에서 역풍을 맞을 수 있다.
▶홍석현 한반도평화만들기 이사장=오늘과 같은 사태를 막기 위해 이 모임이 출범했는데 결과적으로 사후 대책을 논의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직면했다. 늦었지만 우리 정부가 한걸음 더 나아간 방책을 갖고 대화에 나서야 한다. 우선 양국 고위층 인사들이 서로 자제하면서 냉각기로 들어가야 한다. 쉽지 않겠지만 ‘레토릭’을 순화하면서 대화 채널을 넓혀갈 필요가 있다. 우리가 자존심을 희생하는 국면으로 가기 전에 해결해야만 한다.
▶최상용 전 주일대사=격분은 이 정도로 멈추고 우리의 당당한 입장을 국내외적으로 조용히 설명해야 한다. 국제사회가 이성과 분노의 싸움으로 인식하면 우리가 불리해진다. 연말에 중국 베이징에서 열리는 한·중·일 정상회의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할 것 같다. 그 전에 10월 22일 새 일왕 즉위식에 축하 사절을 보내야 한다. 우리 국민이 이해하고 일본이 받아들일 수 있는 특사를 보내야 한다.
▶위성락 전 주러시아 대사=8·15 광복절이 코앞이다. 우리가 더 강력하게 반응하면 상황이 더 악화할 것이 분명하다.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수위를 낮추면 조금 달라질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겠나.
▶김현철 전 청와대 경제보좌관=아베 내각이 각 성·청에 대(對)한국 제재안을 요구할 때 크게 세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고 한다. ▶국제규범에 저촉돼선 안 되고 ▶일본에 영향이 없으며 ▶양 국민의 인적 교류에 영향이 없는 안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한국 정부와 기업에 직접적 타격을 줄 수밖에 없다. 경제산업성은 이번 조치를 ‘수도꼭지 전략’이라고 부른다. 언제든지 잠갔다 풀었다 하면서 협상의 레버리지를 갖는 전략이란 의미다.
▶김동열 중소기업연구원장=일본의 견제가 처음은 아니다. 2003년 통상산업성(현 경산성)을 중심으로 ‘타도 삼성’을 내걸고 ‘히노마루 반도체 프로젝트’를 진행했지만 반도체 업체 간 이해관계가 맞지 않아 결국 실패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1년에도 특별법까지 마련하면서 대일 무역 역조를 극복하려고 했다. 현 정부가 소재·부품 육성 종합대책을 내놨는데, 전문기업 육성을 중심으로 좀 더 시장 친화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주현 전 청와대 중소기업비서관=비경제적 요인이 통상 환경에 영향을 끼치는 일이 늘고 있다. 대표적인 게 사드 배치 이후 중국과의 경제 관계다. 한·일 간에는 그런 문제가 없었는데 이제 비경제적 요인으로 안정성이 타격받는 환경이 됐다. 이런 흐름이 지속할 수 있다는 점에서 모든 물품은 아닐지라도 주력산업의 핵심 부품에 대해선 국산화를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김준 SK이노베이션 사장=이제는 일본이 한국 기업에 대한 수출허가를 자의적으로 판단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문제다. 이런 불확실성을 해소해야 한다.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소재·부품 국산화와 관련해 국내에서 만들었을 때 믿을 수 있게 인증해 주는 것이 중요한데, 그런 인증 인프라가 약하다. 국내 인증을 못 받아 해외로 나가는 경우가 많다.
▶서석숭 한일경제협회 부회장=국내 기업에 불화수소를 공급하는 모리타는 창업한 지 100년이 넘은 회사다. 기술은 곧 특허다. 일본 기업은 특허로 무장돼 있다는 얘기다. 국산화를 하려면 이런 특허 장벽을 누가 해결할 것인가. 또 국가가 특정 분야와 대상에 보조금을 주면 상계관세 적용 대상이 된다. 이런 우려를 누가 검토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이지평 위원=일본도 중앙정부의 지원은 어렵지만 지방정부가 보조금을 주는 경우가 있다. 100년 기업의 기술을 지금 당장 뛰어넘을 수는 없으나 차세대 제품을 개발하는 방향으로 추진할 수 있다고 본다.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일본의 공식 명분은 전략물자 통제가 안 된다는 것이다. 산업부는 왜 3년간 협의에 응하지 않아 일본이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빌미를 내준 것인지 매우 궁금하다. 내부적으로 검토해 오해가 풀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일본의 통상 조치는 지정학적 리스크 전반에 대한 우리 산업계의 대응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한·일 관계뿐 아니라 미·중 무역 마찰이 확대되면 사실상 장벽이 세워질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그동안 우리가 누려왔던 글로벌 공급망의 혜택이 제한받을 수밖에 없다. 공급의 안정성을 위해 필요한 부분은 국산화하거나 대체 공급선을 확보해야 한다.
▶구자열 LS그룹 회장=단시간 내 대체 공급처를 확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새로운 공급처를 확보해도 추가 비용과 시간이 많이 소요돼 관련 산업 생태계를 구성하는 수많은 협력업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원천기술 확보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특허를 많이 가진 기업들에 대한 인수합병(M&A)을 적극 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정리=김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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