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전문가 12명이 펴낸 『복합 대전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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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갈 수 없는 지정학적 운명공동체, 그것이 한·일 양국의 숙명이다. 그런데 양국 관계가 꽁꽁 얼어붙었다. 이명박 정부 말기 때부터 균열이 가기 시작했으니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간다. 이 불편한 기간은 그야말로 한·일 관계의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할 만하다. 정부 간 대화가 사실상 끊기고 국민감정도 나빠졌다.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징용 피해자 보상 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깊어지기만 했다.
일본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따른 유·무상 8억 달러 지원금으로 과거사 채무가 일괄 타결됐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한국의 입장은 다르다. 청구권 자금을 받아 포항제철과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 경제 개발에 활용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위안부와 징용공 등 피해 당사자는 사과와 배상을 받지 못했다고 반발한다. 2015년 12월 박근혜 정부가 가까스로 화해치유재단을 출범시키고, 일본 정부가 기금 지원에 나서면서 극적인 화해가 이뤄지는가 싶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와 화해치유재단이 사실상 해체되고, 한국 대법원이 2018년 10월 징용공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하면서 대립이 격화했다.
그사이 피해 당사자들은 계속 세상을 떠나고 있다.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이제 13명에 불과하다. 징용공 갈등 문제는 오히려 일촉즉발 상태로 치닫고 있다. 대법원 판결에 따라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미쓰비시중공업에 대한 강제집행이 개시돼 이들 기업의 한국 내 자산에 대한 현금화 절차가 추진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실제 현금화가 이뤄지면 단호한 대응에 나서겠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한국 정부로선 사법부의 결정과 피해 당사자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양국 모두 정치적 해결에는 손을 놓고 있는 양상이다.
‘천천히 서둘러라’ 지혜 되새겨야
홍석현 한반도평화만들기 이사장은 서문에서 “한·일 관계는 중증 복합골절 상태”라며 “이럴 때일수록 기존과는 다른 독창적이고 전방위적 차원의 역발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협력의 효과를 확인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슈라도 바로 실행해야 한다.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말한 ‘천천히 서둘러라(Festina Lente)’의 지혜를 되새기라”고 강조했다.
책에는 각계의 한·일 관계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포럼 위원장을 맡은 신각수 전 주일대사를 비롯해 정재정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 최희식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 이창민 한국외대 일본학과 교수, 정구종 한일문화교류회의 위원장, 권태환 한국국방외교협회 회장, 김현욱 국립외교원 교수, 박영준 국방대학교 교수, 이신화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윤태성 카이스트 교수가 참석했다.
이 분야에서 30년 안팎 일본을 연구해온 전문가들이다. 이들은 이슈가 있을 때마다 모여 현안을 진단하고 대안을 논의했다. 한·일 관계가 냉각된 상황에서 한국 전문가들의 건설적 제안이 나오면서 일본 총리가 관심을 기울일 정도로 일본 정치권에서도 귀담아듣는 포럼으로 자리를 잡았다. 양국 정부 간 대화가 경색된 상황에서 꾸준히 양국 정부에 대화를 촉구하자 민간외교의 창구가 된 셈이다.
상호 부정적 역사관에서 벗어나야
총론을 집필한 신각수 한일비전포럼 위원장은 양국 정부가 왜 대화해야 하는지 그 심각성을 역설했다. 그는 “지난 10년간 한·일 상호 간의 인식·감정·이해·기대·신뢰의 갭은 크게 확대되었다”면서 “이런 격차의 확대는 양국의 상대방에 대한 호감도와 신뢰도를 크게 감소시켰다”고 진단했다. 지난해 6월 한국일보-요미우리신문 공동 한·일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호감도는 20.2%에 그쳤고,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호감도는 38%를 기록했다. 신 위원장은 “한·일 양국 간에는 외교정책 상에서 상대방을 별로 안중에 두지 않는 상호 경원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역사관부터 북핵 대응과 문화·민간교류, 경제 현안까지 다룬 각론은 매우 구체적이다. 정재정 교수는 ‘한일 역사 현안의 극복과 역사 화해의 실현’에서 “한국과 일본이 함께 역사문제를 다뤄온 지도 70년 이상 지난 만큼 이제는 부정적 역사관에서 벗어나 서로 대화·타협해 공동 번영의 미래를 구축해야 할 때”라고 촉구했다. 무엇보다 정 교수는 이 책에서 지난 수십 년간 위안부와 징용공 문제의 경과를 소상히 기록했다. 양국 갈등의 원인과 배경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그간 화해 노력도 많았지만, 두 나라 모두 첨예한 국내 정치 현실 앞에서 번번이 물거품으로 끝나고 말았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이 집필한 ‘북일 관계와 한일협력’도 이 책의 볼거리다. 북·일 관계는 사실 한·일 관계의 핵심 변수로 떠올랐다. 언제든 국익에 도움만 된다면 북한과 수교하겠다는 일본의 대(對)한반도 정책을 고려하면 일본과의 관계 개선은 더욱 시급해진다. 하지만 북한 비핵화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 협력도 안 되는 상황에서 양국 간 갈등은 폭발 직전에 있다는 게 문제다.
무엇보다 이 책은 안보협력 네트워크와 지역구도 안정화에 대한 시사점이 크다. 특히 중국의 해군력 증강과 적극적 해양 진출은 동아시아 안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나아가 한·미·일 협력과 인도-태평양 지역 및 국제질서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동북아 힘의 균형을 위해서라도 한·일 안보협력의 논의가 절실하다는 의견이다.
최희식 국민대 교수는 한·일 정책네트워크의 재구축을 촉구했다. 그동안 양국 정치·경제·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가 있었지만, 시대 변화를 반영해 공공외교 관점에서의 전략적 교류를 활성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를 통해 정책 커뮤니티의 인적 쇄신과 40~50대 후속 세대의 양성이 활성화돼야 미래지향적인 협력이 가능하다는 게 최 교수의 제언이다.
이창민 교수가 집필한 ‘한일 경제네트워크의 확장적 심화’도 눈길을 끈다. 한국 경제의 눈부신 도약으로 한·일 간에는 수직적 분업 관계와 만성적 대일 무역적자 구조가 사실상 깨지고 있다. 오히려 이런 ‘탈(脫)일본화’에서 한·일 경제협력이 가능하다는 관점은 신선하다. 초고령사회와 탄소 중립 추구 등 공통점이 많아 시장의 확장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정구종 위원장이 제안한 한·일 문화 교류의 필요성과도 연결되는 주제다.
수평관계로 전환, 반일정서 경계를
이 책이 더욱 흥미로운 것은 한·일관계의 극적인 변화상을 꿰뚫고 있다는 점이다. 이신화 교수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상대적 우위를 점했던 일본이 강약 관계에서 수평관계로 전환 중인 한국과의 관계에서 ‘골든 크로스’ 현상을 경계하면서 지난 10년 동안 일본 내 혐한 감정이 한층 뚜렷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경제연구소는 2028년 한국인의 1인당 국내 총생산(GDP)이 일본을 추월한다고 전망했다. 이런 역전 현상은 2012년 이후 고개를 든 일본의 반한 감정에 더 부정적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일본 지도층과 국민이 전후 세대로 완전히 교체돼 식민지 시기에 대한 죄책감을 갖지 않게 되면서 일본의 우경화 현상이 심화할 수 있는 상황이다. 한국에선 피해자 중심주의와 친일세력 청산을 앞세워 반일정서를 확산하는 정치권의 퇴행적 자세는 쉬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미래로 눈을 돌려야 한다. 홍 이사장은 “기성세대는 양국 젊은이들이 한·일 관계의 미래를 마음껏 설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줘야 한다”고 촉구했다.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일본이 징용 피해자들의 보상금을 거부한다면 돈은 우리가 내고 일본 지도자로부터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받아내면 된다. 더구나 협력할 일이 많아지고 있다. 일본이 사실상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 경제동반자협정(CPTTP)을 주도하면서 한국은 당장 일본의 양해가 절실하다. 중국의 CPTTP 가입 선언으로 한국도 참여가 불가피해졌다. 여기에 끼지 못하면 자칫 ‘글로벌 통상 왕따’로 전락하게 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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