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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 고려대 교수] 한·일 관계 굳건히 하려면 화해위원회 설치해야

By 한반도평화만들기    - 24-01-26 11:03    1,022 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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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는 국익론에 기반을 둔 제3자 변제안으로 징용자 문제를 돌파하고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을 끌어냄으로써 국면을 전환했다. 지금까지의 경로를 부정하고 새로 다른 길을 찾기는 쉽지 않다. 미래 세대를 위해서는 개선된 한·일 관계가 역행하지 않도록 미진한 부분을 보완하면서 전환된 국면을 공고히 해야 한다.

공고화는 크게 두 방향에서 가능하다. 하나는 합의된 사안을 제도화하여 지속성을 담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피해자의 상처와 국민감정을 치유하는 것이다. 나는 내년 국교정상화 60주년을 앞두고 치유의 방향에서는 천황 방한을, 제도화의 방향에서는 한·일 신조약 체결을 제안한 바 있다. 이 두 사안은 국내 합의를 바탕으로 양국 간에 원만한 협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국면 전환 시 발휘된 거친 돌파력보다는 공고화에 필요한 섬세한 조정력이 요구된다. 


문제는 누가 추진할 것인가, 즉 추진 주체에 있다. 우선 외교부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외교부는 선뜻 전면에 나서기 어렵다. 지난 제3자 변제안 도출 과정에서 대법원에 제출한 의견서와 양금덕 할머니 서훈(인권상)에 대한 이견 제시로 불신의 대상이 되었다. 게다가 컵의 남은 절반은 채우지도 못한 상황이지 않은가. 이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다뤄야 할 사안들이 단순한 외교 문제가 아니라, 국내 정치, 특히 적대적 진영 대립의 양상을 보이는 팬덤 정치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정쟁에 휘말려버리면 외교부는 움쭉달싹 못하게 될 것이다.

임란 후 조·일 중재자로 나선 쓰시마

상당한 권한을 가진 국가안보실장급 인사가 핫라인을 통해 물밑에서 진행하는 방식은 불투명성으로 인하여 밀실 야합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지일·지한파 국회의원 간의 네트워크는 작동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고, 한일의원연맹 회원들은 당파성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렇다면 누가 주체가 되어 난제를 풀어가며 추진해갈 수 있겠는가? 실마리를 임진왜란 이후 쓰시마의 역할에서 찾아보자.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이 철수하고 이듬해 참전했던 명군도 철수하여 임진왜란은 끝났다. 정권을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쓰시마 번주에게 협상권을 주고 조선에 국교 재개를 요청해왔다. 협상 시작 10년 만인 1609년 기유조약이 체결되어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진다.

오랜 시간이 걸린 이 협상은 3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진행되었다. 전후 질서를 재구축해야 하는 조·일 양국과 그 사이에서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쓰시마번의 삼각관계다.

조선은 끌려간 포로 송환 등 전후 문제 해결과 북방에서 흥기하는 여진 세력 때문에 일본과의 적대적 관계를 지속하기 어려웠다. 새롭게 출범한 도쿠가와 막부도 안정된 통치를 위해서는 조선과의 관계 정상화가 필요했다. 비록 도쿠가와 쇼군의 지배하에 있지만 조선과의 무역 없이는 생존하기 어려운 쓰시마는 국교 회복을 위한 중재에 혼신의 노력을 쏟았다.

조·일 협상 위해 국서까지 조작

조선과 일본은 오늘날의 한국과 일본보다 훨씬 거리가 먼 나라였다. 임진왜란에 대한 인식과 평가는 물론, 정치 체제도 사회 문화도 전혀 달랐다. 양국의 정점에 있는 조선 국왕과 막부 쇼군은 서로를 이해하고 공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여기에 완충 지역 쓰시마와 중재자 쓰시마 번주의 존재 이유가 있었다.

조선은 국교 정상화의 조건으로 도쿠가와 쇼군이 먼저 조선 국왕에게 국서를 보내올 것을 쓰시마 번주에게 요구했다. 당시 외교 관습상 먼저 국서를 보낸다는 것은 상대국에 공손히 순종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에 쇼군이 이 요구에 응할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결국 번주는 쇼군 몰래 국서를 위조하여 조선에 보냈고, 이어서 조선 국왕의 회신 국서를 은밀히 고쳐서 쇼군에게 바쳐가며 협상을 진행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유조약이 체결되고 조선통신사가 파견되어 이후 250년에 이르는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쓰시마의 국서 위조를 조선은 협상 당시 눈치채고 있었으나 묵인했고, 쇼군은 조약 체결 이후에 알았으나 죄를 묻지 않았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국교 정상화를 위한 쓰시마의 방편적 노력의 필요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쓰시마 번주가 가문의 명운과 번의 존망이 걸린 위험천만한 행위를 할 수 있었던 요인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자. 참과 거짓, 선과 악으로 이분되지 않는 외교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을 갖고 있던 쓰시마는 전후 국교 정상화의 필요성을 확신하고, 수단 선택에 있어 유연하게 사고하고 있었다. 아울러 외교 관행과 절차에 대한 깊은 실무적 지식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담대한 사고와 치밀한 실행으로 양국 사이의 차이를 중재·조정하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화해위가 한·일 공동체 모태 되기를

지금이 개선된 관계의 공고화가 필요한 시점이라면 쓰시마와 같은 역할을 해줄 주체가 요청된다. 나는 한국의 한일화해위원회와 일본의 일한화해위원회 그리고 양국의 공동화해위원회를 제안한다. 화해위원회는 언제든지 부상할 역사 문제와 관련된 사안들을 관리하고, 천황 방한이나 한·일 신조약 체결과 같은 앞으로 필요한 사안을 기획할 것이다.

한·일 우호 협력이라는 기치 아래 화해위원회는 양국의 견해 차이로 인한 현실의 제약을 살펴 가며, 상호 신뢰를 기반으로 전문 지식을 활용하여 이견을 조정하고 지혜로운 방안을 찾아갈 것이다. 양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문명국이지 않은가. 편협한 민족주의와 국민 정서에 매몰되지 않고 단순한 국익을 넘어서 지난날의 상처를 상호 치유하는 상생적 어프로치가 가능할 것이다.

화해위원회가 작동하게 되면 리더십 교체와 무관하게 미래를 향한 노력이 안정적으로 지속할 것이다. 프랑스와 독일의 우호 협력 관계가 유럽공동체를 창출했듯이 화해위원회는 한일공동체 형성의 모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박홍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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