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한·일 지도자 ‘통 큰 거래’ 시도해보길
본문
지난 8일 위안부 배상 판결로 한·일 갈등이 최고조로 치닫고 있다. 지난해 말 박지원 국가정보원장, 김진표 의원 방일을 필두로 동북아 새판 짜기를 시도했던 유화 무드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있다. 북핵 위협은 커지고, 미·중 갈등이 지속하면서 미국의 바이든 신 행정부가 한·일 관계 개선을 촉구할 것이 자명한 데 양국 관계는 다시 역방향 질주 중이다.
위안부 배상 판결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판결이라는 점에서 일본 기업을 대상으로 한 2018년 대법원 징용 배상 판결과 질적으로 다르다. 일본 정부에 대한 법적 배상 책임 부과다. 2015년 외교 당국 간 위안부 합의를 사실상 형해화시킨 상태에서 사법부가 나서 배상을 요구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위안부 합의를 원점으로 되돌린 것이나 다름없다. 외교는 협상과 타협의 여지가 있지만, 사법 판결은 선택의 여지도 재량의 여백도 없어서 한·일 관계에 대한 파장은 클 수밖에 없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요구하던 ‘공식 사과’와 ‘법적 책임’ 중 후자를 확정했다는 점에서 국내적으로는 상징적 판결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국제적으로 통용될지는 불확정적이다. 우선, 위안부 문제는 국제 인권의 절대 원칙에 관련되기 때문에 주권 면제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입장은 국제법적 논란과 검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일본 정부는 주권 면제 대상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둘째, 판결을 실효적으로 집행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일본 정부의 국내 자산을 압류하려 할 경우 국제 공법과 주권 면제 원칙이 되살아날 공산이 크다. 일본 정부 자산에 손을 댄다면 상호주의에 따라 우리도 손해를 감수해야 하고, 외교 관계의 근간을 흔드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셋째, 일본은 2015년 위안부 합의에 따라 일본 정부의 예산을 투입한 화해 치유재단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보상한 선례가 있다. 47명 중 35명이 지원금을 수령했다. 현 정부는 피해자 중심주의에 어긋난다면서 재단을 해산했다. 한국이 위안부 합의를 형해화한 상태에서 일본 정부에 사법적 배상 의무를 부과한 것이라 외교적 파장이 커질 수밖에 없다. 넷째, 독일·이탈리아 간 강제노동을 둘러싼 국제사법재판소(ICJ) 판결이 시사하듯 한국 법원의 사법 판단이 강대국 중심의 국제법 체계에서 인정될지 미지수다.
한·일 관계의 근본적 손상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배상 판결의 확정 시기를 늦추는 방법이 있다. 최종 확정 판결의 시기를 조절해 가면서 상급 법원에서 다른 판결이 나올 수 있는 여지를 열어두는 방법이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 정부가 항소해야만 한다.
둘째, 한·일은 한·일 기본조약 3조에 따라 국제 분쟁의 해결 절차에 들어갈 수도 있다. 판결을 집행할 수 있는 적절한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는 분쟁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조정 및 중재 절차에 위탁하는 것도 갈등 조절의 방법이다.
셋째, 일본 정부가 갹출한 자금이지만 화해 치유재단의 청산 과정에서 남아 있는 56억원을 배상 원금으로 활용하는 방법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다만, 한·일 외교 협상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부담을 걸머져야 한다. 넷째, 일본 정부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과를 하고 위안부 피해자들이 소(訴)를 취하하는 방법도 있다. 서로 양보하는 마음이 있어야 가능하다. 다섯째, 한·일간 ‘통 큰 거래’를 시도하는 것이다. 위안부·징용 문제는 물론 경제적 보복 조치, 북한 문제 등 모든 사안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정치적 합의를 하여 동시 행동의 원칙 아래에 이를 실천함으로써 관계 정상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양국 지도자의 정치적 결단이 있어야 가능하다. 어느 하나 녹록한 것이 없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겸 국제학연구소장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