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경 중앙일보 주필] 빈자 죽이는 난폭한 최저임금은 정의롭지 않다
본문
자영업자 비명 질러도 밀어붙여
수술 성공했는데 환자는 죽어가
생사람 침대 올려 다리 자르는
프로크루스테스와 뭐가 다른가
이하경 주필
수술은 성공했는데 환자는 죽어가고 있다.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는 최저임금 인상 얘기다. 가난한 사람들의 허전한 호주머니를 채워주기 위해 또 다른 빈자(貧者)를 사지로 몰아넣었다. 2년에 걸쳐 29%를 올리자 600만 자영업자들이 “못살겠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다.
최저임금제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누리기 위한 수단일 뿐인데 신성불가침의 상징으로 둔갑했다. 어기는 업주는 감옥에 갈 수도 있다니 극형이 따로 없다. 지금의 최저임금 인상은 그리스신화의 악당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다. 그는 멀쩡한 사람을 침대에 눕힌 뒤 키가 침대의 길이보다 길면 다리를 잘라 죽이고, 짧으면 몸을 잡아 늘려 죽인다. 수술 성공을 위해서라면 환자가 죽어나가도 괜찮은가. "삶은 멀리서 보면 비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독백이 어울리는 장면이다.
빈자에게 더 많은 소득을 주는 것은 인간적이고, 소비를 늘려 투자와 생산을 확대하는 자본주의적 처방이기도 하다. 한국은 재정지출로 소득불평등을 완화하는 정도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최하위권이어서 가난한 사람의 소득 자체를 늘려주는 것은 바람직하다. 문제는 종업원이나 알바보다 처지가 나을 것도 없는 식당과 편의점 주인들은 갑자기 오른 최저임금을 감당할 길이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외면했다는 점이다. 나의 정의를 위해 너의 고통을 무시하겠다는 것인가.
빗발치는 재심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은 “절차상 하자가 없다”며 고개를 돌렸다. 과연 올바른 태도인가. 어떤 강력한 이론도 만들어진 순간까지의 상황만 설명할 수 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현실을 통해서만 내다볼 수 있다. 그래서 현실의 욕망과 고통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어 원칙을 수정할 수 있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2017년 9월 청와대 집무실에서 만난 문재인 대통령과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 [중앙포토]
물론 최저임금은 그 자체로는 죄가 없다.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과 만난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만약 최저임금이 오르면 사람들은 지출을 늘리고 추가적인 소비를 진작하며, 이는 성장모델의 균형을 바꾸어 놓는다”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동시에 충고도 잊지 않았다. “임금 인상 속도가 너무 빠르면, 일부 구성원들이 도태될 수 있다. 변화는 언제나 환영할 일이지만 늘 효율성을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 이제라도 되새겨야 할 소중한 조언이다.
빈부격차를 줄이는 것을 첫 번째 개혁과제로 추진하던 브라질 룰라 대통령을 2004년 8월 중앙일보 이장규 대기자(현 GIMCO 회장)가 만났다. 이 대기자는 “브라질처럼 풍부한 자원을 가진 나라에 어째서 5000만 명이 넘는 절대빈곤층이 존재하는가”라고 물었다. 전혀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한국은 1950년대에 농지개혁을 했지만 브라질은 그러지 못했고, 아직도 그것이 풀어야 할 숙제다.” 50년대 농지개혁의 주역은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이하경칼럼
철저한 반공주의자인 이승만은 전향한 공산주의자인 조봉암을 초대 농림부 장관에 임명해 농지개혁을 단행했다. 유상 수용, 유상 분배 원칙 아래 농민의 절대다수인 소작농을 자작농으로 만들었다. 김성수는 지주세력을 대변하는 한민당의 지도자였지만 동료 지주들을 설득했다. 우파인 이승만이 평등의 시대를 열겠다는 좌파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 좌우가 합심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김일성은 1950년 남로당 출신 박헌영의 “밀고 내려가면 남조선에서 인민 봉기가 날 것”이라는 말을 듣고 6·25 남침 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농민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전쟁 3개월 전의 농지개혁으로 양반과 상놈, 지주와 소작농이라는 봉건적 신분제도가 무너졌고, 누구나 내 땅을 갖게 된 평등한 세상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브라질과 달리 한국은 농지개혁을 통해 산업자본이 성장할 수 있는 나라가 됐다. 농지개혁은 신생 대한민국을 구한 것이다.
최저임금제로 빈부의 격차를 줄이고 경제의 선순환을 유도하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의도는 이승만의 농지개혁과 마찬가지로 선하다. 문제는 프로크루스테스식의 난폭한 접근이 생존의 한계선상에서 사투를 벌이는 서민들을 더 힘들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농지개혁과 최저임금은 평등의 과제다. 그런데 지금은 농업국가였던 1950년대와는 달리 이해관계가 복잡하고 다원화된 시대가 됐다. 그렇다면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충분히 듣고 지역별, 업종별 형편을 감안해서 추진했어야 했다. 과정이 공정하지 않은 최저임금 인상은 기회를 평등하게 만들지도 못하고 정의롭지도 않다. 빈자를 죽이는 최저임금 인상 질주의 희비극은 이쯤에서 끝내야 한다.
이하경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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