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림 연세대 교수] ‘3·1운동’ 100년의 성공과 실패
본문
짧게 보면 3·1은 실패였지만
세계가 한국인 요구 주목하고
처음으로 통합 정부도 이뤄내
하지만 임정의 분열, 파쟁으로
대통합의 3·1정신은 끝내 실패
연대·통합의 자세 갖춰야할 때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3·1 100주년을 맞는 새해 벽두 한 현장을 둘러보았다. 유년시절 부친의 손을 잡고 걸었던 길이다. 평범하나 비범했던 많은 평민들·농민들·청년들이 잡혀가고, 재판받고, 고문받고, 순국하고 옥살이를 하게했던 장소다. 만세고개도 걸어보고, 기념관과 평민동상도 둘러보고, 일본군의 진출을 막고자 끊으려했던 고향어귀 다리 위에도 서본다. 당시의 깊은 외침들이 귓가에 울려온다.
3·1은 앞선 모든 사상과 몸짓들이 흘러들어가고 이후의 모든 가치와 노력들이 흘러나온 절정의 분수령이요 최대의 봉우리였다. 사람과 사람, 마을과 동네, 경향과 각지, 생각과 노선들이 하나가 된 일대 대동의 국면이었다. 3·1은 우리가 처음으로 자각적·주체적으로 세계와 만난 때였다. 아래로부터 쳐든 자발적 기치를 통해 우리가 세계대세와 함께 가고, 세계정신이 우리와 함께 했던 시대였다.
100년 전 각성된 우리는 대한제국의 백성도 일본제국주의의 황국신민도 아닌, 자유와 평등, 주권과 평화를 위해 행동하는 민주공화시민이자 세계시민이고자 했다. 3·1의 횃불은 자주독립과 민주공화와 세계평화의 횃불이었다.
그 3·1 100년의 성공과 실패를 돌아본다. 짧게 보면 3·1은 실패였다. 일제를 구축하지도 못했고, 원래의 독립을 회복하지도 못했다. 민주공화국 시민의 지위도, 한반도의 평화도 이루지 못했다. 이후의 고초는 형언할 수 없었다. 25년의 한일전쟁·광복전쟁과 더 큰 아시아·태평양전쟁의 고난은 죽음·억압·징병·징용·가난과 함께였다. 한국인들이 겪은 최초의 전체주의로서 제국주의·군국주의·전체주의가 함께 왔다.
그러나 3·1은 실패가 아니었다. 먼저 세계를 깨웠다. 10년 전 생명을 던진 안중근을 통해 세계가 놀랐듯, 3·1로 세계는 다시 한국인들의 요구를 주목했다. 세계는 이들의 병합이 결코 합법적·순리적·자발적인 아닌 불법적·강제적·일방적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안중근이 훗날 세계를 뒤흔든 가브릴로 프린치프, 마이클 콜린스, 본회퍼의 선구적 보편이었듯. 3·1은 윌슨·레닌·파리평화회의, 그리고 중국·터키·이집트·인도의 가치 및 운동들과 앞뒤를 나란히 했다.
박명림칼럼
3·1은 우리 혼이 죽지 않았음을 스스로 확인하였기에 성공이었다. 공동체의 바탕이 되는 정신의 터짐이요 분출이었다. 민중의 혼과 뜻이 말라죽지 않았고, 다만 지도자들이 힘을 합쳐 똑바로 한다면 언제든 함께 할 수 있음을 보여준 쾌거였다. 이후 3·1은 자유와 평등. 주권과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 모두의 자양분이 되었다.
3·1의 최대 성공은 과거극복과 나라통합이었다. 3·1 이후 그리고 8·15 광복 이후 전통왕조와 복벽주의는 다시 불려나오지 않았다. 왕정의 조종(弔鐘)이었다.
대신 이전의 모든 흐름·갈래·이념·세력들은 민중의 폭발에 놀라 대한민국과 민주공화의 기치 아래 하나로 모였다. 통합정부였다. 내내 갈라져 다투다 처음이었다. 친청·친러·친일·친미의 아귀다툼이 어떤 끔찍함을 초래했는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민주공화 통합정부는 3·1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3·1의 통합정신은 끝내 실패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분열과 파쟁은 통합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3·1 이후 갈라진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각 진영 내부의 심한 분열과 파쟁은 끝내 광복 이후까지 이어졌다. 전전에 내전을 겪은 나라들조차, 전후에는 미소대결로 인한 분단·분열·전쟁을 크게 두려워하며 대타협을 통해 연립·연대·연합·통합 정부를 수립하고 있는 비상상황에서 우리 지도자들은 38선을 넘는 연대·연합·통합정부를 제안·추진·수립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승만·김구·조만식·송진우·김일성·박헌영·여운형은 8·15와 귀국직후-탁치논쟁 이전시기에 가장 먼저 모두가 만나 연합·통합에 합의했어야 했다. 그것이 3·1정신이었다. 그러나 집권·독점·봉대·추대·법통·유일·창당을 놓고 다투다가, 세계가 놀랍게도 찬탁반탁으로 나뉘어 세계에서 가장 앞장서 이념전쟁을 시작하였다. 대통합의 3·1을 완전히 죽인 대분열이었다.
3·1 100년을 맞아 오늘의 우리를 돌아본다. 우리는 지금 내부 파쟁과 갈등을 넘어 연대와 통합을 이룰 제도와 자세를 갖추고 있는가? 민주 없는 공화 없고, 공화 없는 민주 없다. 둘은 분리되면 나머지 하나도 죽는다. 또 대내평화 없는 대외평화는 없다. 연합과 통합, 즉 대내평화는 대외평화의 필수조건이다. 그 마음과 자세 없이는 감히 3·1정신을 이어받았다고/이어받자고 말하지 말자.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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