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림 연세대 교수] 난마의 한국외교, 난항의 대한민국(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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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와 비교할 때 한반도는 유독 장기평화를 향유하였다. 그러나 일단 침략을 당하면 참화는 상상을 초월했다. 제국과 제국, 대륙과 해양, 문명과 문명이 교차하는 경계국가로서 기회와 숙명을 함께 부여받은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었다. 이 점을 꿰뚫은 선현들은 한반도 문제를 복배수적(腹背受敵) 구도로 파악한다. 앞과 뒤가 모두 적이라는 인식이었다. 이는 누란의 위기였던 동아시아 7년전쟁(1592-98)과 청일, 러일이 경쟁하던 한말에 절정에 달했다.
근대로의 진입은 한반도의 복배수적 구도를 세계화하였다. 앞서 세계에 눈뜬 민영환은 러시아에 대한 대비를 ‘천일책(千一策)’의 첫째 조목으로 언급한다. 박규수는 전투적 수구적 민족주의가 넘쳐날 때 일본과의 평화적 개항을 주장한다. 박규수·민영환·안중근은 국제공법·동양평화·한일공존·한국독립을 주창한 3·1운동의 모범적 선구였던 것이다.
선각 민영환은 대미외교를 위해 감옥의 골수 반도(叛徒) 이승만조차 석방·활용·후원한다. 중·일·러 견제의도였다. 의회주의와 공화주의 혁명가 이승만은 애국을 위해 특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끝내 황제의 호출에 응하지 않았다. 황제알현을 단호히 거부하였음에도 끝끝내 이승만을 파견하는 민영환의 결기와 초당파적 애국은 오늘에 더욱 절실하다. 정부정책을 비판하는 담론조차 친일·매국·이적으로 몰아가는 오늘에 비하면, 황제와 왕당파에 정면 도전한 의회파 반정부지도자를 외교에 활용한 왕당파 의회주의자 민영환의 포용은 놀랍다.
광복 직후 역시 지도자들은 공산전체주의와 구제국주의 일본 사이에 놓인 복배수적 구도를 깊이 인식하였다. 개항 이래 1953년 정전협정까지 자기문제에 대한 국제 논의에 초청받지 못했던 한국이 맺은 첫 번째 동맹조약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이었다. 중국·소련·일본·북한과 같은 당시 복배수적들에게 차례로 침략당한 100년 비원의 귀결이었다.
민영환 이래의 꿈을 이어받은 이승만의 승부수 한미동맹은 한국의 국제연대와 국가번영의 한 초석이었다. 중화체제 붕괴 이후 지정학적 소란을 처음으로 가라앉힌 한미동맹 이후 한일(1965), 한러(1990), 한중(1992)관계를 거치며 한국외교 지평은 부채살처럼 세계로 펼쳐졌다. 번영과 외교의 비약적 동행이었다.
그러나 한중, 한러 관계 정상화 사반세기 만에 미소냉전을 대체한 미중 대결의 격화로 한국은 다시 결정적 기로에 들어서 있다. 북한의 핵무장과 일본의 경제보복을 맞이한 오늘 반북과 반일 구도 안에서 치열하게 길항하고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해 1동맹 4우호가 정답이다. 한미동맹과 한중, 한일, 한러, 남북 우호관계가 바른 해법이다.
그럴 때 1592년 일본의 침략과 한말 직전처럼 내부 정치에 외교문제를 활용하면 할수록 외교는 더욱 수렁으로 빠져든다. 일부 정부 고위인사들이 반일감정을 선동하고, 반일 반대=친일로 낙인찍는 행위는 민주국가에서 심각한 문제다. 어떤 외교·안보문제도 민간투쟁·의병행동을 독려하는 행위는 관군과 정부 실패를 자임하는 행태이기 때문이다. 즉 민주정부는 국민 호소에 앞서 국가가 해야 할 임무를 먼저 수행해야 한다. 국가가 제대로 대처하면 국민은 할 일이 없는 게 외교다. 근대 외교에 (대외) 협상과 (대내) 비준의 2단계를 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둘째 반일정책 반대가 친일이라는 왜곡은, 반공 반대가 용공·친북이라는 낙인처럼 사실이 아니다. 반공의 반대는 친공이 아니라 대부분 자유·인권·민주주의·평등을 함께 담고 있었다. 반일의 반대 역시 친일을 넘어 민생·경제·국익·다원성·평화를 함께 담고 있다. 민주국가에서 국민 일부를 국가의 과거와 현재의 정당성 파괴세력-일본 및 북한-과 일치시키는 것처럼 흑백논리요 자기모욕적인 진영 담론은 없다.
결국 한국 외교가 난마에 빠진 원인은 민족과 외세, 애국과 매국의 이분법 및 진영 담론이 기저이유였던 것이다. 그럴 때 (핵위협에도 불구하고) 남북공존·남북평화는 친민족이며 애국이고, (경제전쟁 종식을 위한) 한일공존·한일평화는 반민족이자 매국으로 매도된다. 그러나 둘 모두가 필수고 둘 모두가 애국이다. 선현들의 복배수적 지혜를 기억하라.
외교에 성공한 근대국가 사례들, 특히 교량국가로 비약하여 대평화를 구가한 경계국가 사례들, 그리고 민영환·김대중·노무현처럼, 국내의 반대진영조차 외교에 적극 활용하는 연합정치가 바른 길이다. 내부 연합이 발원하는 통합, 즉 대선각 류성룡, 이순신, 민영환, 안중근처럼 내부 연대가 먼저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외교가 가장 필요한 나라”라고 본 김대중은 “외교가 운명을 좌우한다” “우리에게 외교는 명줄”이라고 생애 마지막까지 강조한다. 그가 연합정부를 통해, 또 외교·통일·안보 핵심 직위에 보수인사를 앉히고, 나아가 내부 경쟁세력을 매국·이적으로 낙인찍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이미 1950년대에 한국의 복배수적 위치를 선명하게 짚어낸다. 반공과 반일의 선동외교는 내정의 실패를 호도하기 위한 술책이라는 강력한 비판과 함께.
박명림 연세대교수· 김대중도서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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