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연 서울대 교수] 한·일 관계 복원이 시급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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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북한 문제에 대해 일본 신문과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 말미에 일본이 한국에 대해 경제보복을 하면 어떤 결과가 벌어질 것 같으냐는 질문을 받고 필자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양국 지도자들은 한일 관계라는 중요한 자산을 부채로 만드는 어리석음을 범해 왔다. 그런데 일본의 경제 보복은 어리석음을 넘는 광적인 행위다. 한국인의 불같은 정서를 고려하면 이 갈등은 양국 관계를 장기적으로 파탄 낼 수도 있다.”
불행히도 이 예측이 현실로 되고 있다. 그것도 국가 간 갈등을 제어해야 할 정부가 이를 증폭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일본은 역사 문제 때문에 경제보복을 했고 한국은 이에 대해 안보 이슈로 되갚고 있다. ‘역사→경제→안보’로 번져가는 위기를 두 정부가 자초하는 셈이다. 이러한 상호 대응은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 일본의 경제보복, 한국의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종료 결정이 상대국의 행동을 바꿀 가능성은 낮다. 상대국에 고통을 주기엔 그 충격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양국이 입게 될 부정적 파급 효과는 매우 클 수 있다. 편익보다 잠재적 손실이 훨씬 크다는 말이다.
일본의 대한(對韓) 수출규제는 한국 기업의 공급망에 균열을 가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공급망 균열이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충격은 오래가지 않는다. 20세기 후반 이래 공급망 충격이 가장 컸던 동유럽에서의 체제전환 사례도 그랬다. 자본주의로의 이행 과정에서 사회주의 중앙계획이 폐기되자 국유기업 사이 촘촘히 얽힌 공급망이 대부분 붕괴됐다. 그러나 이 같은 극단적 충격도 동유럽 대부분의 체제이행국에서 3~4년 만에 사라졌다. 시장경제의 역동성이 공급망 균열을 신속히 복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출규제를 최대 집행해도 한국 대기업이 받는 공급망 충격은 여러 방법으로 희석될 것이다. 큰 보상을 제시하고 긴요한 소재를 생산하는 일본 공장의 외국 이전을 추진할 수도 있다. 중소기업은 상대적으로 더 큰 충격을 받게 될 것이다. 그 중 일부는 문을 닫아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충격도 ‘창조적 파괴’를 통해 점차 회복될 것이다. 한국이 버티기로 작정한다면 단기 충격은 넘을 수 있는 파고다. 2011년 일본 대지진 때의 공급망 충격 효과나 브렉시트(Brexit)의 예상 충격과 견주어 볼 때, 일본의 수출 규제가 한국의 국민소득을 감소시킬 최대치는 2%를 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역사 문제가 일으킨 불은 경제를 넘어 안보로 번지면서 양국이 입을 잠재적 피해를 위험하리만치 키우고 있다. 불길을 잡아야 하는 정부는 서로를 응징하는 ‘팃포탯(Titfor tat) 전략’으로 오히려 불길을 퍼뜨리고 있다. 그 결과는 엄청난 비용 청구서로 양국 앞에 던져질 수 있다.
한·일 갈등은 북한 비핵화를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다. 지소미아가 종료돼 대북 감시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우려가 한가지 이유다. 더 중요한 이유는 중국과 러시아가 한·일 갈등을 동북아에서 미국의 영향력 약화로 해석하고 이 틈을 노려 대북 제재 완화 카드를 쓰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양국은 지금이 한반도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호기로 인식하고 제재의 실질적 완화를 통해 북한 품기에 나설 수 있다. 제재 실행의 핵심인 두 국가가 제재공조 대열에서 이탈하면 북한 비핵화는 물 건너간다.
지금 북한 비핵화를 추동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경제제재다. 아직은 효과를 발휘하고 있지만 미·중 갈등과 북·중 밀착에 따라 제재의 뒷문이 반쯤 열린 상태다. 중국과 러시아는 한·미·일 공조가 힘든 틈을 이용해 뒷문을 완전히 열어버릴 수도 있다. 밀수를 묵인하고 자국에서 일하는 북한 근로자를 돌려보내기는커녕 더 많이 불러들일 수 있다. 자국 내에 북한의 합작법인 설립을 방조하며, 더 많은 관광객이 북한을 방문하도록 유도할 수도 있다. 이로 인해 북한의 외화수입이 늘어나면 김정은은 버틸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미국은 대륙간탄도미사일 전부와 핵탄두 일부만 제거하는 것을 비핵화 협상의 목표로 삼을 수도 있다. 그 결과 한국과 일본은 북핵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일본의 수출 규제로 시작된 한·일 갈등은 한국을 북·중·러 쪽으로 밀어낼 가능성마저 있다. 지소미아 종료를 ‘미국이 이해했다’고 말한 한국 정부를 미국은 신뢰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일 관계의 파열이 이젠 한미동맹의 균열까지 일으키고 있다. 앞으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예측하기 어려운 언행이 한국 내 정치 역학과 맞물리면 동북아의 위험한 균형이 한순간 다른 쪽으로 쏠리게 될 경우도 배제할 수 없다.
한일 관계 복원은 시급한 문제다. 이에 실패한다면 문재인 정부는 외교를 게을리 해 일자리를 지키지 못한 정부로 판명난다. 따라서 청와대의 일자리 상황판은 없애야 옳다. 국익 목록에서 북한 비핵화와 안보도 빼야 한다. 지소미아 종료 결정과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와 안보가 빠진다면 문재인 정부의 국익 목록엔 무엇이 남아 있을까. 국민 자존감, 이 뿐인가.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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