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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경 칼럼] 슬픔의 전사 한강이 우리에게 묻는 것

By 한반도평화만들기    - 24-10-28 14:47    87 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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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신입생이던 1977년 봄 세상을 조금 더 알려고 법정에 갔다. 푸른 수의(囚衣)를 입은 소년이 공포에 떨고 있었다. 빵 한 조각을 훔친 죄. 무심한 국선변호인은 “배고파서 그랬습니다”라고 한 뒤 입을 닫았다. 장발장의 고통을 해결하지 못한 국가의 원죄(原罪)를 판사도, 검사도 외면했다. 김광규 시인의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의 “혁명이 두려운” 소시민 군상(群像)처럼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고통받는 약자를 정죄(定罪)하는 부조리한 세상에 필요한 건 혁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국은 혁명 없이 절망 같은 어둠에서 벗어났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 공동수상자인 미국 경제학자는 “한국이 민주화를 통해 경제를 훌륭하게 발전시켰다”고 했다. 만인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분단·전쟁·독재의 비극을 통과하면서 피를 흘렸고, 압축 성장의 후유증은 여전하다.

오늘 충분히 눈물 흘리지 않고
내일의 꿈을 함께 꿀 수 있을까
양심과 연민으로 연대해
문명국가의 시민이 될 것인가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는 모두가 앞만 보고 질주할 때 홀로 뒤돌아 앉아 함께 눈물 흘리는 사람이다.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를 다룬 『소년이 온다』, 제주 4·3사건의 피해자를 소환한 『작별하지 않는다』는 역사적 비극을 겪고 허물어진 사람들을 부둥켜안고 있다. 『채식주의자』도 육식문명을 거부해 스스로 식물이 되어 간다고 믿는 여성의 몰락을 그리고 있다. 영혜는 몸과 마음의 현실감을 상실하는 이인증(離人症·depersonalization)까지 겪는다. 한강은 개인의 고통과 슬픔의 세계에 자발적으로 걸어 들어간다.

한강을 힘들게 읽으면서 러시아 형식주의 문학이론가 쉬플로프스키의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를 떠올렸다. 습관화는 모든 것을 ‘무감각의 무덤’으로 삼켜버리고, 느낄 수 없게 하고, 마침내 어떤 사물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사물을 낯설게 해야 비로소 본질이 보인다고 했다. 한강은 늘 낯선 곳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조차 모호하다. 전위적이고 불편하다. 잃어버린 삶에 대한 감각, 인간 존엄성을 회복시키려는 의도다. 이 병적인 시대가 그토록 숭배하는 오만한 화폐도, 요사(妖邪)한 정치도 감당할 수 없는 난제를 비무장한 문학이 필사적으로 끌어안고 있다.

작가에게 『소년이 온다』의 집필은 고통이었다. “한 문장을 쓰고 한 나절을 울기만 하다가 겨우 진정하고 다시 한 문장을 썼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먹먹했던 대목은 계엄군에 의해 죽은 사람의 영혼들이 그림자가 되어 슬퍼하는 장면이다. 작중 화자(話者)인 중학생 정대는 독백한다. “하지만 몸 없이 누나를 어떻게 만날까. 몸 없는 누나를 어떻게 알아볼까.” 사자(死者)의 비애가 위로가 된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라는 고백은 한강의 내면 풍경이다.

그가 발화(發話)한 시적 언어는 나라 밖에서 먼저 공감받았다. 우리의 냉담이 부끄럽다. 이 나라 최고의 가치는 경쟁과 성공이다. 오직 1등, 승자만 기억한다. 관용·연대·평등의 완충지대는 어디에도 없다. 한국인은 집단으로는 늘 천국 언저리를 배회하지만 개인은 무간지옥을 헤맨다. 그래서 한강은 아포리아에 갇힌 21세기 한국에 강림(降臨)한 축복이다. 불화하는 모순에 신음하는 우리를 대속(代贖)하려는 듯 시선은 저 골고다 언덕에 고정돼 있다. 존재의 개별성과 고유성을 회복하고, 위엄 있는 삶의 주체로서, 타인과 연결돼 살아갈 것을 명령하면서.

영국인 데버라 스미스는 『소년이 온다』를 〈Human Acts〉로 의역했다. ‘인간이 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원작의 비장한 의미를 살렸다. 문득 연암(燕巖) 박지원의 기행문 『열하일기』의 “호곡장(好哭場)”이 떠오른다. 연암은 광활하게 펼쳐진 요동벌판을 보고 “한바탕 통곡하기 좋은 곳”이라고 적었다. 세계문명의 중심지로 직진한 18세기 변방 지식인의 환희와 슬픔이 동시에 솟구친다. 세계는 폭력에 희생된 영혼을 위로하려는 한강의 레퀴엠에 격하게 공감했다. 그래서 노벨 문학상을 주기로 한 것이다. 나와 연결된 존재의 불행에 둔감해진 내가 눈 감고 귀 막고 있는 동안에.

한강은 비정한 시간과 공간을 거부하는 슬픔의 전사(戰士)일 것이다. 비극적 기억의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몸서리쳐온 그를 향해 이젠 우리의 결의를 보일 차례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중략)/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정호승 시 ‘슬픔이 기쁨에게’).

세계가 먼저 발견한 한강은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 존재인지를 끊임없이 묻는다. 양심과 연민으로 연대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것인지, 그래서 문명 국가의 시민으로 살아갈 것인지를 추궁하고 있다. 눈에 눈물이 어리면 그 렌즈를 통해 하늘나라가 보인다. 우리가 오늘 충분히 슬퍼하지 않고, 눈물 흘리지 않고, 내일의 꿈을 함께 꿀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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