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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연 서울대 교수] AI 대전환기의 승패는 ‘문(文)’에 달렸다

By 한반도평화만들기    - 26-10-19 12:19    5 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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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런던 금융가의 한 임원과 대화를 나누었다. 학부와 대학원에서 각각 공학, 경영학을 공부했다는 그에게 다시 대학에 간다면 어떤 전공을 택하겠느냐고 물었다. 기다렸다는 듯 ‘역사’라고 답했다. 지금 같은 대전환기에는 수십 년이 아니라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 유사한 사례를 찾아 배워야 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지난해 스웨덴 왕립과학원이 경제사학자 조엘 모키어를 포함한 3인에게 노벨경제학상을 수여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특히 상금의 절반을 모키어에게 배정함으로써, 수학·계량적 접근이 주류인 경제학에서 1차 산업혁명이란 역사 연구를 통해 현시대를 이해하는 틀을 제시한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했다. 이는 평상시를 가정한 이론이나 최근 수십 년의 데이터만으로는 지금의 격변을 가늠하기 어렵다는 통찰로도 읽힌다. 


지금은 260여 년 전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될 무렵과 가장 닮았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후반까지 대전환의 시기에는 인간의 힘을 대체하는 기계가 발명되고 산업에 도입됐을 뿐만 아니라 영국과 유럽대륙 사이 패권 경쟁도 벌어졌다. 이때 영국은 세 단계에 걸친 도전에 모두 성공하여 세계의 패권국으로 등장했다. 1단계(1760~1780년)에는 와트의 증기기관 등 새로운 범용기술을 발명했고, 2단계(1780~1830년)에는 신기술을 제조업 전반에 적용했다. 더 결정적인 것은 3단계(1830~1870년)였다. 선거법 개정, 교육 확대, 근로조건 향상 등 대대적인 ‘제도개혁’을 이뤄낸 것이다. 연평균 경제성장률 역시 1단계 0.9%, 2단계 1.6%에서 3단계 2.4%로 껑충 뛰었다. 만약 제도개혁이 없었더라면 정치와 경제적 불평등이 낳은 갈등으로, 앞서 이룬 성과마저 무너져내릴 수 있었다. 1차 산업혁명은 증기기관이란 기술로 시작됐지만, 이를 완성한 것은 인간에 대한 성찰과 제도의 혁신이었다.

격변의 시대에 최대의 위험은 전환의 속도를 인간과 제도가 따라가지 못할 때 발생한다. 1990년대 초의 구소련 붕괴 후 자본주의로의 이행기에 러시아가 겪은 실패가 대표적이다. 국제통화기금이나 세계은행은 국유자산의 사유화와 가격·무역의 자유화만 실행하면 자본주의가 빠르게 정착할 것으로 낙관했다.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도 이런 정책으로 사회주의를 시장경제로 단번에 전환하면 인간과 제도 문제는 알아서 풀리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의 임기 동안 국민소득은 36%나 감소했다. 대통령직에서 퇴임하면서 그는 “내가 너무 순진했다”라고 고백했다. 한국의 외환위기 경험도 비슷했다. 외채를 빨리 갚는 데만 집중한 나머지, 사람을 보호할 제도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을 간과했다. 그 결과 우리 사회는 ‘잘살아보세’를 넘어서는 가치를 만들지 못한 채, 위험 회피형 각자도생의 시대로 들어섰다.

미·중 패권 경쟁도 세 번째 단계인 제도개혁에서 판가름 날 것이다. 미국은 1단계인 AI 발명에서 유리하지만, 중국은 AI를 제조업에 적용하는 데 강점이 있다. 그러나 승패는 AI가 낳는 불평등과 실업, 지대추구와 정치 갈등을 완충하고 해결하는 제도에서 결정된다. 미국이 패권을 유지할 수 있느냐는 AI의 과실이 소수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고, 심각한 정치·경제의 양극화를 완화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중국의 운명은 AI가 공산당의 감시와 정보 독점, 권력층의 특권을 더욱 강화하게 될지, 이를 제어하고 개방적인 제도를 도입하는 계기가 될지에 따라 갈릴 것이다. 아무리 기술의 발명과 확산에 성공하더라도 정치와 경제 제도를 공정하고 포용적이며 효율적으로 만드는 데 실패한다면 앞선 단계에서의 판도는 뒤집힐 수 있다. 결국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 기술을 품어낼 ‘새로운 사회적 합의와 제도’를 창출해 내는 국가가 최종 승자가 된다.

지금 한국의 관심은 첫 번째 단계인 기술 개발에 쏠려있다. 그러나 AI 대전환기의 결정적 승부처는 세 번째 단계인 인간과 제도다. AI가 몰고 올 인간 정체성의 혼란을 극복하고 실업과 불평등이 사회 갈등을 증폭하지 않도록 이끌 책임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에 있다. 인문학은 AI 시대에도 사람이 가치 있게 살기 위한 사유와 상상력의 지평을 열어준다. 약자·패자의 무력감과 불신이 정치적 분노로 조직화할 위험이 존재할 때, 사회과학은 증거와 합리성을 바탕으로 공동체를 위한 최적의 합의 방안을 제시한다. 기술 진보의 과실을 누구에게, 어떤 기준으로 나눌지 그 규칙을 설계하는 일도 결국 사회과학의 몫이다. 그러나 한국은 하드웨어에는 막대한 재원을 투입하면서 사람과 제도를 준비할 지적 기반에는 관심이 없다.

AI가 지식을 값싸게 만들수록, 인간의 욕망과 사회의 갈등을 읽고 이를 제도로 풀어내는 능력은 더욱 귀중해진다. 기술이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국가 간 패권 경쟁의 근본에서는 인간을 이해하고 사회를 혁신하는 ‘문(文)’의 역량 대결이 펼쳐지고 있다. AI 시대는 진정한 ‘문의 귀환’이자 ‘문의 시대’다.

김병연 서울대 석좌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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