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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정 전 서울대 총장] ‘신뢰 자본’의 추락,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By 한반도평화만들기    - 26-10-19 12:25    9 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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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종언(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1992)의 저자로 유명한 미국의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의 또 다른 대표작은 『신뢰(Trust)』(1995)이다. 후쿠야마 교수는 이 책에서 국가 경쟁력의 중요한 원천 중 하나는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 (Social Capital) 이라며, ‘신뢰 자본’이 낮은 나라는 거래에 사회적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선진국으로 발전하기 어렵다고 주장하였다. 세계은행도 2007년 내놓은 ‘국부(國富)는 어디서 오는가’라는 보고서에서 “한 나라의 부(富)는 법질서와 신뢰, 지식경쟁력 등 사회적 자본에서 나오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은 국부의 81%를 사회적 자본으로 만들어 냈다”고 기술하였다. 이처럼 상호 신뢰는 한 국가의 경쟁력에 매우 중요하다. 게다가 상호 신뢰의 중요성은 국제 관계에서도 무시할 수 없다. 국가 간의 신뢰가 뒷받침될 때 상호 협력이 쉬워지고 공공선을 도출하는 공동체 의식이 형성되어 국제 관계가 안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신뢰 자본이 추락해 여러 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우선 국제 정세를 보면, 과거 막강한 국력을 바탕으로 세계질서를 주도하던 미국에 대한 신뢰가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유럽과 함께 소위 ‘가치 동맹’을 결성하여 자유무역을 통한 전 세계의 경제 성장, 각국 주권의 보장, 보편적 인권의 존중, 기후 변화 등 지구적 위기의 대응 등을 주장하였고, 적어도 겉으로는 이러한 명분을 지키려는 모습을 보여 왔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미국이 이 같은 동맹의 ‘가치’를 공공연히 무시하고 자기 나라의 국익만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일이 잦아지면서, 국가 간 신뢰가 많은 타격을 입었다. 아마도 이란-미국 전쟁에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트럼프 대통령을 적극적으로 돕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국가 간 신뢰의 위기가 불안정한 국제 정세로 이어지면서,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국내의 여러 불안정한 정치 상황도 신뢰의 위기에 기인한 바가 크다. 주지하다시피 이재명 대통령의 지지도는 집권 1년 차에는 안정적으로 60%를 상회해 대통령 선거 득표율을 뛰어넘었었다. 아마도 부처 업무 보고와 국무회의 등을 공개하며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였고, 실제로 성과도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2년 차에 들어와서 지지율이 하락하기 시작해 지금은 30% 중반까지 내려왔는데, 부정 평가의 중요 이유로 ‘부동산 정책’을 꼽는 사람이 많다. 정부가 부동산 시장 안정을 위한 여러 정책을 발표했지만 시장은 계속 불안하니, 국민들이 정부의 정책 역량을 의심하기 시작해 부정적으로 돌아선 것으로 해석된다. 결국 ‘신뢰의 위기’인 것이다.

사실 정부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정치권 전체가 위기에 처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국정감사에서 보이는 저질스러운 국회의원들의 모습에 많은 국민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고, 민생과 관계없이 벌이는 거대 양당의 내부 권력 투쟁에 국민들은 조용히 신뢰를 거두어 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객관적으로 평가된 우리나라의 사회적 자본 지수는 세계 하위권인데 (2023년 영국의 싱크탱크 레가툼의 조사에 의하면 한국은 조사 대상 167개국 중 107위), 더욱 떨어질 일만 남은 것 같다.

하지만 후쿠야마 교수의 말대로 사회적 신뢰 없이는 국가가 발전하기 어렵다. 특히 인공지능으로 인한 문명 대전환의 시대에는 국민들이 서로 신뢰를 갖고 통합적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문제는 신뢰를 잃는 것은 한순간이지만, 신뢰를 회복하는 데에는 긴 시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어렵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필자는 첫 번째 스텝으로 경청(傾聽)을 제안한다. 우리 모두는 결점이 있는 인간이고 모든 상황을 다 이해하고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면, 적어도 의견이나 진영이 다른 사람의 의견도 들을 마음은 생길 것이다. 둘째는 최소한의 규범(規範)을 지키는 일이다. 인류는 오랜 역사를 통해 서로 다른 사람, 심지어 적과도 같이 사는 법을 배워 왔다. 그 과정에서 생성된 것이 예의와 규범이다. 즉 오래된 규범에는 같이 사는 인류의 지혜가 묻어 있는 것이다.

다음은 절제(節制)이다. 사실 필자는 절제가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말할 기회를 가졌다고 해서 타인에게 참기 어려운 상처를 준다거나, 권력을 가졌다고 상대를 무자비하게 탄압한다면 서로 원한만 쌓이고 신뢰를 쌓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회가 오래 존속하고 번영하려면 힘있는 사람들의 절제가 꼭 필요한 이유이다. 정치학자들도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핵심적 축(軸)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오세정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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