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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연 서울대 교수] 소련의 복권과 국채, 북한의 인민공채

By 한반도평화만들기    - 20-05-28 09:52    4,781 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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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에서도 ‘돈’이 문제였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레닌은 화폐 없는 경제를 만들겠다며 ‘일만 악의 뿌리’인 돈의 사용을 금지시켰다. 자본주의에선 돈을 벌기 위해 노동해야 하고 이는 화폐를 물신화(物神化)하고 인간을 소외시킨다는 마르크스의 비판에 따라 사회주의는 무(無)화폐 경제가 돼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화폐를 없앤 후 몇 년도 되지 않아 레닌은 백기를 들어야 했다. 소득이 급감하고 생필품 부족이 극심해지자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하는 수 없이 화폐제도를 다시 도입해 주민이 소비재를 취득할 땐 자신의 소득으로 사게 했다.

사회주의 소련에서도 권능을 인정받은 화폐는 여러 문제를 일으켰다. 주민들은 이자도 없고 인출도 쉽지 않은 은행 예금을 최대한 피하고 저축 중 상당 부분을 현금으로 보유했다. 돈이 은행에 들어와야 기업의 대부자금으로 이용될 수 있을 텐데 그 가능성이 막혀버린 것이다. 딜레마에 빠진 소련정부는 예금주를 대상으로 복권(lottery)을 도입했다. 불로소득을 비판하는 사회주의에서 복권까지 인정하며 유휴 화폐를 은행으로 흡수해 보려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초 소련가계의 예금은 총 금융자산의 40%에 그쳤다.

화폐도 없어야 한다던 소련이 자본주의의 상징인 채권을 주민에게 판매한 것도 사회주의 이념을 크게 위배한 사건이었다. 재정의 필요를 채우고 주민이 보유한 통화도 환수하려는 목적이었다. 정권 초기부터 시작한 국채 판매가 여의치 않자 반(半)강제로 떠안겼다. 그러나 조악한 인쇄로 만기가 되기도 전에 채권 글씨가 지워져 원금을 찾기 어려운 일이 빈발했다. 일부 주민은 구입하자마자 아예 벽지로 써버릴 정도였다. 1982년에는 20년 만기인 채권을 발행하고 매입자들을 추첨해 1, 2등에겐 각각 볼가 세단과 지굴리 승용차를 경품으로 제공했다. 타락한 자본주의의 징표라고 비판한 복권을 소련 스스로 따라 한 것이다.

정부 재정엔 정권 차원의 속임수도 동원했다. 소련의 재정은 수입과 지출이 균형이거나 소폭 흑자로 줄곧 발표됐다. 이는 적자가 빈번한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가 더 우월하다는 선전에 자주 이용됐다. 그러나 서방 학자들은 채권 판매액을 포함해 소련이 발표한 항목별 재정 수입을 모두 더해도 항상 총수입보다 적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993년 필자는 러시아 문서보관소에서 그 이유를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극비’라고 명시된 문서엔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재정적자를 메운 금액이 적혀 있었다. 소련 정권은 상당액의 화폐 발행을 재정수입으로 잡고선 대내외엔 균형재정을 이루었노라고 선전한 것이다.

북한도 최근 인민공채를 발행했다고 한다. 데일리NK에서의 첫 보도가 아직 공식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그 개연성은 상당해 보인다. 기사에 따르면 공채 중 60%는 기관과 기업에게 발급, 이를 자재생산 기업에게 현금대신 지급하고 물자를 받게 하는 목적이다. 나머지 40%는 돈주와 개인을 대상으로 외화를 받고 판매한다고 한다. 북한은 2003년에 한국전쟁 이후 처음, 소련을 모방해 복권 형식 무이자 공채를 발행한 적이 있다. 그러나 발행 후 5~10년에 걸쳐 원금을 상환한다던 공채는 그 기간의 높은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거의 강제로 돈을 빼앗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인민공채 발행은 자력갱생이 한계에 가까웠음을 보여준다. 기관과 기업대상의 채권 발행은 제재와 코로나 사태로 기업 간 공급사슬이 크게 훼손됐음을 시사한다. 사회주의 기업은 중앙계획에 따라 목표량을 생산해 공급사슬의 다음 기업에게 전해야 한다. 그러나 북한 정부가 생산에 필요한 자원을 공급하지 못하자 많은 기업이 가동을 줄이거나 중단하고 있다. 제재 이전에는 정부 지원이 부족해도 무역으로 돈을 버는 기업과의 주문계약제를 통해서나 생산품의 시장 판매를 통해 생산 자원을 부분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역과 시장의 위축으로 이마저도 어렵다. 자재 생산 기업이 억지로 공채를 인수하더라도 외상거래를 계속 버틸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은 실패한다는 뜻이다.

돈주에게 외화를 받고 공채를 팔려는 시도는 북한 정권이 심각한 외화난에 처해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돈주에게 충분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이들은 매입을 꺼릴 것이고 그 과정에서 강제력이 동원될 수도 있다. 그 강제력은 작게는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며 크게는 북한 정권이 경제세력과 명운을 건 싸움을 벌여야 하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

한 번의 깜짝쇼를 제외하고 6주 동안 잠적하다 나온 김정은의 일성은 핵전쟁 억제력 강화였다. 그러나 그는 실패한 소련이 가르치는 명쾌한 교훈을 배워야 한다. 핵전쟁 억제력이 없어 소련이 망한 게 아니다. 돈과 경제 문제가 붕괴의 기저요인이었다. 북한의 아킬레스건도 경제다. 사회주의 경제의 결함을 공채 발행으로 때울 수 있다는 몽상은 하지 말라. 왜 사회주의는 실패하는지 근본 원인을 알지 못하면 북한의 미래도, 그의 앞날도 밝을 수없다.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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