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각수의 한반도평화워치] 한·미 동맹 기반으로 중국과 호혜 관계 추구해야
본문
한국은 냉전과 탈냉전 시기에 비교적 유리한 외교 환경의 혜택을 누렸으나, 이제 건국 이후 가장 어려운 포스트 탈냉전 시대를 맞고 있다. 5월 출범할 새 정부로서는 확실한 것은 불확실성밖에 없다는 혼돈의 복합대전환기가 초래할 고차방정식을 풀어야 한다. 전환기에 키를 잘못 잡으면 그 후과가 장기간 미친다는 점에서 막중한 책임이 있다.
현재 우리 외교는 주요 국가들과의 관계가 경색된 사면초가의 고립 상황이다. 문재인 정부가 역점을 둔 북핵 교섭은 하노이회담 결렬 이후 교착 상태로 인해 북한의 핵 능력만 고도화한 반면, 북한이 핵 포기의 전략적 결단을 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북한은 미·중 대립 상황에서 중국을 뒷배로 핵무장 완성과 함께 경제제재와 코로나19로 인한 난국을 내부 단속과 자력갱생으로 돌파하겠다는 심산이다.
북한·중국 중시한 현 정부의 근시안적 시각에서 벗어나야
미·중 대결 속 우리 국익에 맞는, 기본에 충실한 외교 필요
한·일 관계 조기 복원하고, 인도태평양 비중 계속 늘려가야
바이든 정부는 ‘조정되고 실용적인 접근’ 정책을 통해 조건 없는 대화 재개를 내세웠지만, 북한의 외면으로 답보 상태다. 결국 북핵 폐기를 위한 기회의 창은 거의 닫혀가고 있다. 2018년 일시 풀렸던 남북 관계도 북한이 하노이회담 이후 한국을 철저히 외면하고 노골적 비하로 일관하면서 얼어붙었다. 문 정부의 한반도평화프로세스는 껍데기만 남았고, 제재 완화와 종전선언 추진으로 외교 자원을 허비했다.
남북 관계 앞세워 비핵화 동력 상실
우리 외교의 기축인 한·미 동맹도 미·중 대립 속에 올바른 방향 설정에 실패함으로써 상당한 혼선을 초래하였다. 미·중 격돌의 본격화로 ‘안보 미국, 경제 중국’의 바탕 위에 구사한 전략적 모호성은 유지하기 어렵게 됐다. 북한·중국에 기운 노선으로 한·미 동맹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쌓였다. 북핵 문제에서 당사자가 아닌 중재자를 자처하며, 북핵 해결보다 남북 관계를 우선하여 비핵화 동력을 떨어뜨렸다.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지역 네트워크 구축 과정에 중국을 의식하여 불참함으로써 한·미 동맹을 약화하고 역내에서 외톨이가 됐다. 결과적으로 미·중 양쪽으로부터 소원해졌는데, 한·미 동맹을 기축으로 한·중 관계를 관리했더라면 훨씬 나았을 것이다. 지난해 5월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으로 동맹 강화를 위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꾀했지만, 적기를 놓쳤고 추후 행동·조치로 담보되지 못했다.
문 정부가 공을 들인 한·중 관계도 표류했다. 사드 사태 이후 한·중 관계는 시진핑 주석 방한 불발에서 보듯 냉랭하다. 우리 안보 이익과 전략적 자율성을 침해하는 3불(사드 추가 불배치, 미국의 미사일방어 불참가, 한·미·일 군사동맹 불추구) 약속에도 부당한 사드 보복 조치는 그대로 남아있다. 중국 시장의 중요성과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에 비추어 한·중 관계를 잘 관리해야겠지만, 우리의 가치·국익·원칙·국격에 입각해야 한다. 중국 무역 비중이 높지만 세계 공급망 내에서 상호의존 관계이고, 북한 비핵화보다 북한 생존을 우선하는 중국이 제재 이행 등에 협조하지 않는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
현실과 어긋난 주관적·희망적 분석
‘잃어버린 10년’의 한·일 관계는 수교 이후 최악이다. 강제 징용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현안이 한·일 관계를 짓누르고 있다. 과거·감정·양자 틀에 갇힌 악순환 구조가 정착되어 갈등이 전방위적으로 퍼졌다. 우리 정부가 적극적 노력으로 회복 전기를 마련해야 했다. 진보 정권은 과거사 문제에서 국민을 설득하는 데 유리함에도, 반일 여론을 정치에 이용했다. 추가 악화를 막기 위해 법원의 매각 명령이 내려진 일본 기업 압류재산의 현금화를 유예할 조치부터 신속히 강구해야 한다.
우리 외교가 길을 잘못 든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북한·중국 중심의 근시안적 외교 때문이다. 남북 관계 개선에 중점을 두면서 북핵 문제의 본질을 경시한 희망적 관측과, 선의로 대하면 비핵화의 길로 나설 것이라는 환상이 앞섰다. 빈틈없는 한·미 공조로 국제사회 대 북한의 압력 구도를 만들어 북한의 전략적 결단을 이끌어야 했다. 북한은 서울을 이용해 워싱턴을 움직여 설익은 비핵화와 제재 해제를 맞바꾸려는 시도가 어려워지자 2017년 이전으로 돌아갔다.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우리 주권 사항을 상응하는 대가 없이 양보하는 실수를 했고, 결과적으로 미·중 대립에서 얻을 수 있는 전략적 가치도 살리지 못했다. 전체적 조감도 없이 북한에 중점을 두다 보니 대전환시대의 큰 흐름을 놓쳤다. 외교는 사실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주관적·희망적 분석에 의존하다 보니 객관적 진단과 실효적 처방이 어려웠다.
포스트 탈냉전 시대 한국 외교는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인가. 첫째, 우리 정체성에 맞는 기본에 충실한 외교를 해야 한다. 한국은 자원·에너지·시장의 대외의존도가 높고, 지정학적으로 불리하며,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를 기본 가치로 하는 선진 중견 국가다. 사실상 핵무장 완성 단계의 폐쇄적 전체주의 체제인 북한의 군사 위협에 상시 노출된 분단국이다. 이를 고려하면 튼튼한 안보와 활력 있는 경제를 위해서는 한·미 동맹을 우리 외교의 기축으로 삼고, 이를 기반으로 주변국을 포함한 외연 확장에 나서야 한다.
비핵화 협상과 억지력 강화 병행
둘째, 중국과는 당당한 입장에서 호혜의 동반자 관계를 추구해야 한다. 구동화이(求同化異)의 자세로 상호 이익의 확대를 도모하되, 우리 근본 가치와 국익에 대한 공세에는 원칙과 국제규범에 따라 의연히 대처해야 한다.
셋째, 장기 악화 상태의 한·일 관계를 대국적 차원에서 조기 복원해야 한다. 북한의 핵 위협과 중국의 공세적 외교안보정책에 대한 실효적 대응에 한·일 협조는 필수다. 동시에 정체 상태의 한·미·일 협조 체제도 정상화해야 한다.
넷째, 북핵 위협 대처는 비핵화 협상과 억지·방어 능력 강화의 이중 정책을 통한 현실적 외교를 구사해야 한다. 당사자라는 확고한 인식 아래 교섭에 성과가 있어도 일희일비하지 말고, 상당 기간 상존할 북핵 위협에 이행 기간을 고려한 차분하고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 대북 정책도 북한의 변화와 주민의 생활 개선에 초점을 둔 실사구시 정책으로 전환하고 성과를 검증하면서 진행해야 한다.
다섯째, 포스트 탈냉전 시대 흐름에 맞추는 스마트외교가 중요하다. 미·중 대립이 심화하는 다극 구조화 속에 지정학이 귀환하고, 미국에서 트럼프주의 재등장 위험도 남아 있다. ‘투키디데스 함정’과 ‘킨들버거 함정’에 노출된 국제질서의 커진 변동성에 대한 복원력(resilience)을 길러야 한다. 경제력·군사력에서 자강을 꾀하고, 초연결 시대에 적합한 네트워크력과 소프트파워를 키워야 한다.
여섯째, ‘한국판 인도태평양 정책’으로 역내 능동적 외교를 추구해야 한다. 21세기 대전환의 핵인 인도·태평양의 주요 국가로서 우리의 미래는 열린, 자유로운, 포용적 인도·태평양 질서에 있다.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최대 수혜국 중 하나로서, 인도·태평양 지역에 이 질서가 유지되도록 국력에 걸맞은 외교력을 발휘해야 한다.
닫힌 민족주의 아닌 열린 세계주의
일곱째, 전환기에 독자적 전략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소다자·다자 연합체에 단순 참여를 넘어 주요 행위자로서 유사한 입장의 국가들과 힘을 합해 ‘법의 지배’를 위한 틀을 만들어야 한다. 역내에서 압도적 존재인 중국이 책임 있는 이해 당사국으로 행동하도록 하게 하려면 역내 일본·동남아·호주·캐나다·인도와, 역외 영국·프랑스·독일 등과 다양한 조합의 중층적 연계를 꾀해야 한다.
여덟째, 미·중 대결로 안보와 경제의 연계가 강화되는 만큼 기술·전략물자·자원·식량·에너지 등에 관한 경제안보를 강화하고, 공급망 다변화 움직임이 우리 산업의 경쟁력 강화와 시장 확대로 연결되도록 경제외교에 힘써야 한다.
끝으로 외교나 안보 모두 공짜는 없다. 우리 외교 수요에 맞는 인력·자원이 투입되고 민주 국가로서 국민의 외교 소양도 높아져야 한다. 턱없이 모자란 외교 인프라를 과감히 확충하고, 국가 전체의 외교 의식과 전략 마인드가 성숙하도록 정부와 국민이 서로 부단히 소통해야 한다.
한국은 경제력 세계 10위에 민주주의 국가로 상당한 네트워크력을 가졌다. 강대국에 주눅 들어서도 약소국에 오만해서도 안 된다. 활력 있는 경제, 탄탄한 안보, 당당한 외교가 3박자로 잘 어우러져 복잡계의 포스트 탈냉전 시대를 위기가 아닌 기회로 만들어 국가 번영을 지속해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닫힌 민족주의가 아니라 열린 세계주의로 지구 전체를 조망하는 창의적 복합 외교를 꾀해야 한다.
신각수 법무법인 세종 고문·전 외교부 차관·리셋 코리아 외교안보분과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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