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순의 한반도평화워치] 윤·바이든 회담, 여야도 대외정책 협치 출발점 삼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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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은 오는 21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는다. 역대 한국 정부 취임 후 가장 빠른 한·미 정상회담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중국 견제책인 쿼드(QUAD, 미국·일본·인도·호주 4자 협의체) 정상회담 참석차 일본을 방문하는 길에 한국에 오는 것이지만, 미국이 한·미 관계에 부여하는 비중도 반영하는 행보이다.
한국 대통령들은 언제나 ‘분단의 안정’과 ‘분단의 해소’라는 상충적 과제를 안고 비정상적 외교 궤도를 달려야 했다. 게다가 세계 최고 수준의 안보와 경제의 대외 의존도를 감당해야 한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전임자들보다 더 엄중하고도 사뭇 다른 환경에서 출발한다. 무엇보다 정치와 경제의 규범이 함께 무너진 혼돈의 세계, 우크라이나 사태처럼 신냉전이 열전으로 치닫는 질서의 파열, 끝이 보이지 않는 세계 공급망 경색 같은 현상들 때문이다.
새 정부는 이런 난관을 넘어 새로운 미래를 열어야 한다. 단단하면서도 서로의 필요를 탄력적으로 수용하는 한·미 관계의 작동이 필수조건이다. 이번 정상회담이 그 첫 단추이다. 새 정부가 짧은 시간 내에 모든 지적 자원을 동원하여 준비 중일 것이나, 지혜를 모으는 차원에서 몇 가지 제언코자 한다.
한·미 관계 ‘복원’이 아니라 ‘발전’시켜야
첫째, 대외 정책은 점진적 수정이 바람직하다. 한국은 항로를 급변침할 수 있을 만큼 작은 배가 아니다. 변침각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 진로를 조정해야 성공의 가능성이 커진다. 그런데 역대 새 정부의 패턴을 보면, 집권 시의 흥분과 조급한 성과 욕구의 결합으로 냉혹한 대외 환경과는 동떨어진 결정을 내리곤 했다. 결과적으로 스스로 발목을 잡고 불필요한 대가를 치르는 사례가 허다했다. 이번 정상회담의 의미는 양국의 공동 의제와 우선순위에 대한 공감을 이루는 것으로 충분하다. 당장 결정을 내리기보다 차분한 내부 정책 검토와 실무협의를 거쳐 윤 대통령의 미국 답방 시 결과를 내놓으면 된다.
둘째, 지금 한·미 관계는 ‘복원’이 아니라 ‘발전’시킬 대상이다. 정부 안이든 밖이든 ‘복원’이라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복원해야 할 정도로 관계가 무너졌다면 바이든 행정부를 포함한 미국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실제로 지난해 5월 한·미 공동성명은 동맹의 영역을 시간적·공간적으로 확장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록 당시 한국 정부가 남·북, 북·미 회담들의 성과 주장에 집착한 나머지 마지못해 대만해협 등 미국의 요구들을 수용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긴 했지만, 이 성명은 앞으로 한·미 관계의 중요한 기초가 될 것이다. 새 정부도 이 점을 잘 인식하고 있을 것이나, 혹여 전 정부와 대비시키기 위해 ‘복원’을 동원하고 싶은 유혹은 피하는 것이 좋다.
일본·독일은 군사적 자립 역량 구축
셋째, 한·미 정상회담을 준비할 때는 앞으로 열리게 될 한·중 정상회담도 염두에 둬야 한다. 중국 때문에 말조심하자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 중국에 대해 공히 일관된 입장과 당당한 자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중국에 “북핵 위협이 지속 증대되기 때문에 미사일 방어망의 확충도 불가피할 수 있다”라고 설득하려면, 미국에는 “미사일 방어망에 대해 중국이 보이는 민감성을 고려하여 미국도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와 운용에 대해 중국과 직접 대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해야 한다. 한·미 동맹을 탄력적이고 호혜적으로 운용하는 대표적 사례가 될 것이다.
넷째, 아마 가장 어려운 일로서, 윤 대통령은 이번 회담에서 한·미 동맹의 기능과 역할 분담에 대한 미국의 인식을 냉철하게 파악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트럼프와 바이든 행정부를 넘어 미국을 관통하는 대외 정책의 근간은 ‘동맹 역할의 증대와 미국 부담의 축소’이다. 지난 20년에 걸쳐 미국민의 해외 군사 개입 반대 여론은 지속 상승해 왔다. 지금 우크라이나 파병도 80%가 반대하고 있다.
미국은 2012년 ‘두 개의 전쟁 수행 전략’을 폐기했다. 유럽과 아시아 두 개의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할 태세를 유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내 문제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이런 추세에 맞추어 영국은 자체 핵무기 보유고를 40% 증강하고, 독일은 국방 예산을 30% 이상 증액 중이다. 일본도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 비핵 국가인 독일과 일본은 여차하면 핵 보유로 갈 기본 조건도 이미 갖추고 있다.
이처럼 미국으로부터 확장억제라는 이름의 핵우산 보호를 받는 대표적 동맹국들이 군사적 자립 역량을 적극 구축 중이다. 스스로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겠다는 자세이다. 북한으로부터 핵의 직격 위협에 처해 있는 한국의 사정은 이들보다 더 위중하다. 윤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이런 국제 안보의 실상에 대한 생각을 직접 청취하고, 안팎으로 자유로운 한국의 안보 진로를 다듬어야 할 것이다.
북한의 핵 위협 더욱 높아져
우크라이나 사태는 국론 분열과 강대국 정치가 함께 만든 비극의 현장이다. 20여 년에 걸쳐 고조된 내부 갈등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야욕에 침공의 틈을 보였고, 이로 인해 벌어지는 살육의 참상을 보고도 미국은 동맹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군사 개입을 자제하고 있다. ‘사실상의 방관’이라는 비판까지 감수하는 실체적 이유는 우크라이나를 보호하기 위해 러시아와 핵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 진영이 단합하여 어느 선에선가 독재 국가의 횡포를 저지하겠지만, 약육강식이 뉴노멀이 될 것이라는 우려 또한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러시아와 중국은 그들의 지리적 핵심 영역을 지키기 위해서는 핵 사용도 불사한다는 기본 전략을 갖고 있다. 근래 러시아가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공개 시험하고, 중국은 고비 사막과 신장 지역에 230개의 지하 ICBM 발사대를 추가 건설 중이다. 이들은 자국의 앞마당이 결정적으로 위협받을 경우 우선 전술핵을 사용하고, 만약 미국이 개입하면 미국 본토를 향한 전략핵무기 사용도 불사한다는 신호를 적극적으로 보내고 있다.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근거를 에둘러 오던 북한은 최근 ‘근본 이익 침탈’이라는 포괄적 사유를 동원했다. 북한이 중국과 러시아의 핵전략을 노골적으로 한반도에 원용하는 것이다.
일관성 있는 대북정책 미흡
한국의 진로를 막아온 북한 핵이 수면 위에 부상한 지 33년이 흘렀다. 만약 한·미 동맹이 북핵 문제와 대북 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할 수 있었다면 지금 한국의 대내외 정치·경제 환경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양국 정부가 교체될 때마다 정책은 바뀌었고 핵 개발에 매달려온 북한에 시간을 주었다. 미국은 대외 정책이 21세기에 들어와 두드러지게 ‘단기화’되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대북 정책도 미국 국내 정치에 부수적으로 움직여 왔다. 한국이 정권을 넘어 지속되는 정책의 근간을 견지해야 미국 정책의 단기성을 극복할 수 있다.
북핵 문제는 물론, 호혜적 한·미 동맹의 발전, 미·중 대립의 극복, 한·일 관계 재정립, 경제 안보망 구축 같은 과제들은 그 본질상 어떤 정부도 5년 이내에 결말을 보기 어렵다. 성공의 잣대는 당대의 해결이 아니라 다음 정부도 이어갈 수밖에 없는 정책 기조를 만드는 것이다. 걱정스럽게도 새 정부 취임에 즈음하여 여·야가 갈등을 보이지만, 최소한 대외 정책에서는 협치를 이뤄야 한다. 정부가 야당과도 공유할 수 있는 정책의 공통분모를 넓히고, 야당은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그 과정이 시작될 수 있다.
‘안으로는 화합, 밖으로는 평화’(Concordia Domi Foris Pax). 중세 독일 북부와 발트해 연안 도시들이 맺은 한자동맹의 대표적인 자유시로서 400여 년에 걸쳐 자유와 번영을 누렸던 뤼벡의 성문에 새겨진 경구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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