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호영 전 주미대사] 한·일 관계, 역사와 안보·경제 분리 대응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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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2019년 11월 일본 참의원과 장시간 한·일 관계를 논의한 적이 있다. 이 참의원은 당시 우리나라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종료를 고려하는 데 대한 필자의 의견을 물었다. 필자는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고, 그 이유는 1965년 한·일 협정 이후 어려운 환경에서도 관계 발전을 가능하게 하였던 불문율인 역사와 안보·경제 문제의 분리 대응이라는 레드라인을 넘어서는 조치이기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그러면서 그 발단은 일본이 강제 징용자 문제에 대한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이유로 그해 7월 반도체 부품에 대한 수출 제한을 한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레드라인을 넘어서는 조치였으므로 철회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내심 한국이 지소미아 협정 만료일인 그해 11월 23일에 즈음해 일본의 실망스러운 조치를 언급하면서 한·일 관계 미래를 위해 지소미아를 연장할 것임을 발표하며, “너는 밑으로 가더라도 나는 높은 길을 고수하겠다”라는 도덕적 우위의 자세를 보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다. 한·일 역사 문제는 ‘눈에는 눈’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한·일 관계 개선 노력으로 이어져야
이 이야기를 소환하는 이유는 박진 외교부 장관이 최근 방미 중 기자회견에서 “한·일 지소미아를 빨리 정상화하겠다”는 이야기한 것을 보면서 박 장관이 어려운 결단을 내렸고, 이 결단이 꼬일 대로 꼬인 한·일 관계가 앞으로 나가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희망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 장관의 결단에 대한 국내외 반응은 반드시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국내 언론, 심지어 해당 정부 부서에서도 지소미아 정상화는 다른 현안과 종합적으로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일부 시민 단체는 “굴욕외교”라며 반일 감정에 호소했다.
한·일 역사 문제의 근원에는 상처받은 민족 감정이 자리하고 있어 이성적 해결책이 설 자리가 크지 않고 정치적 폭발력도 매우 크다. 그렇다고 감정적·정치적 안전지대에만 머무른다면 나날이 어려워지는 우리 안보·경제 환경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인 한·일 관계의 미래지향적 발전은 불가능하다.
일본의 반응도 기대에 못 미친다. 박 장관의 발언에 대해 마쓰노 히로카즈 일본 관방장관은 “지역 평화와 안정에 기여할 것”이라고 화답했으나, 그뿐이었다. 일본 정부는 한·일 관계를 풀려는 한국 정부의 노력에 대해 두 역사 문제 해법을 마련하는 게 우선이라는 기존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다음 달 10일 참의원 선거가 일본 정부를 위축시켜 오는 29~30일 나토 정상회의에서의 한·일 정상회담도 어렵다고 한다. 박 장관이 어려움을 무릅쓰고 관계 정상화를 위한 손을 내밀었듯 일본도 적극적으로 화답할 수 없었을까? 여론이 중요하지만, 일반 시민이 보지 못하는 국제 정치의 현실과 그런 현실 속에서 한·일 관계 개선의 중요성을 여론에 호소하는 일본 정치인의 노력을 기대하는 것은 무망한 일일까?
이와 관련해 생각할 것이 미국의 역할이다. 필자는 2013년 6월부터 4년 4개월간 주미 대사로 근무하며 당시 오바마 행정부가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경주하는 노력을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오바마 대통령과 미국 국무·국방장관, 국가안보보좌관은 한·일 관계 개선이 미국의 핵심 안보 이익임을 잘 알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바이든 행정부 출범으로 미국이 다시 이러한 노력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보게 됐다. 미국 정책 결정자들이 한·일 역사 문제가 국민 감정적·정치적으로 얼마나 폭발력이 큰 문제인지, 역사 문제 해결 이후 안보·경제 협력이 가능하다는 입장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이러한 배경에서 분리 대응이 왜 필요한지 잘 인식시키게 하는 게 중요하다. 박 장관의 워싱턴 발언은 그러한 이유에서 높이 평가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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