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세의 한반도평화워치] 윤 정부 ‘담대한 구상’, 북한의 ‘담대한 선택’ 끌어내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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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대북 정책으로 제시한 ‘담대한 구상’은 그간 보수 정부가 취해 온 입장에 비춰봐도 과감하고 유연한 제안이다. 그런데도 북한이 나흘 만에 김여정 담화를 통해 강한 거부 입장을 밝힌 걸 보면 북한의 핵 보유 의지에 변화가 없고 추가 행동도 우려된다. 향후 어떤 전략을 취할지도 짐작이 된다. 이런 때일수록 정부는 냉정하게 대북 전략을 다듬어야 한다.
이번 제안은 더욱 엄중해진 한반도 및 역내외 안보 환경에 맞춰 새 정부가 과거 정부와 차별화한 대북 접근법을 통해 주도적으로 돌파구를 모색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이미 바이든 미 행정부는 출범 후 ‘세밀히 조정된 실용적 접근법’을 통해 외교적 관여 노력을 지속한다는 방침을 천명했다. 지난 5월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남북 협력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면서 북한이 협상으로 복귀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북한이 우리의 제안을 거부하고 나온 마당에 ‘담대한 구상’ 성공의 요체는 어떻게 북한이 대화에 응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조성하고 궁극적으로 ‘담대한 선택’을 하도록 유도해 나갈 것인지의 문제로 귀착된다. 박진 외교부 장관이 “억제·단념·대화의 총체적 균형적 접근법에 따라 북한이 비핵화의 길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환경 조성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은 올바른 방향이다.
대화 열어 놓되 억제·압박 병행해야
윤 정부의 구상은 기본적으로 지난 30년간 한·미 정부가 주로 채택한 포괄적 방안, 단계적 추진의 연장선에 있다. 특히 과거 제안과 합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과정에서 북측이 제시했던 제안을 면밀히 검토한 흔적도 엿보인다.
정부가 앞으로도 대북 설득 노력을 계속할 것이라고 했는데, 이에 앞서 ‘담대한 구상’의 장점을 살리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도록 전략적 측면과 각론 측면에서 한·미가 철저히 조율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리스크를 최대한 줄이고 시행착오를 방지할 수 있다.
첫째, ‘담대한 구상’과 바이든 행정부의 ‘세밀히 조정된 실용적 접근법’ 간 공유 영역을 최대로 넓혀야 한다. 바이든 행정부의 ‘세밀히 조정된 실용적 접근법’은 그간 구체적 내용이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북한의 태도 변화를 면밀히 확인하면서 그에 맞춰 대응해 나가려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상습적인 합의 불이행과 최근의 고강도 도발 지속,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협상 방식 불신 등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간 한·미 정부 출범 초기에는 늘 새로운 대북 접근법이 나왔는데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크고 작은 이견과 갈등을 조율해야 했다. 윤 정부와 바이든 정부는 상호 신뢰가 높아 상대적으로 이러한 부담은 적지만 북한의 태도에 변화가 없는 상황에서 우리 제안이 미국보다 앞서가면 긴밀한 공조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북한이 스스로 핵무기를 포기할 가능성이 없다고 보는 미국의 입장에서 북한의 선제적 비핵화 조치를 상정해 과감하게 움직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에 중간선거가 있는 해는 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다.
북핵 고도화에 협상 목록 지속 확대
둘째, 과거의 포괄적 접근 방식 추진 사례에서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다. 포괄적 접근이 현실적으로 불가피하고 서로의 관심 사항을 최대한 반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타결 시까지 장기간이 소요되며 합의 후 어느 단계에서 장애가 생기면 전체 틀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제네바 합의 이후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비밀 개발, 9·19 공동성명 이후 검증 의정서 합의 실패, 2·29 합의 이후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 등이 합의를 무산시킨 사례다. 북한 핵 능력 고도화에 따라 협상 목록표(matrix)가 지속해서 확장되고, 한·미 정부 교체 때마다 상호 단계적 조치가 변화하면서 우선순위와 강조점에서 일관성이 부족했던 것도 약점이다.
셋째, 북한의 안보 우려 사항을 적절한 수준에서 포함할 수 있지만, 포함 범위에 따라서는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그간 북한의 정치·안보 분야 관심사항은 ‘적대시 정책 폐기’라는 주장 아래 평화체제, 제재 해제·완화, 안전 보장, 관계 정상화 등의 요소가 합의문에 일부 반영되었다. 그러나 군사훈련의 중단 축소 폐지, 전략자산 배치 금지, 주한미군 철수, 핵우산 철폐 같은 본질적 요소는 포함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충동적으로 합동군사연습 중단을 발표했지만 이러한 유인책에도 북한의 핵 능력은 증가하기만 했다. 남북 간 ‘재래식 무기 체계의 군축 논의’를 추가로 의제화할 경우, 비핵화 협상이 자칫 한반도 재래식 무기 감축 협상이나 북·미 핵 군축 협상으로 변질할 수 있다. 북한의 대화 복귀 자체를 위해 과도한 대가를 지불하거나 협상 카드를 너무 많이 보여줄 필요는 없다.
담대한 구상과 미 전략 동조화해야
넷째, 유엔 대북 제재 면제나 완화 문제는 우리와 국제사회가 가진 매우 유효한 레버리지이므로 북한의 핵 폐기 완료 시까지 아껴 써야 한다. 현재의 강력한 유엔 대북 제재 구조는 2006년 이후 10년여에 걸친 총력외교 노력의 산물이며 중·러까지 참여시켜 구축한 국제사회의 귀중한 자산이다. 하노이 회담에서 김정은이 5개 핵심 제재 해제에 주력한 것은 제재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북한은 이후 중·러를 통해 제재 해제를 필사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경제 분야의 담대한 구상의 일환으로 제재의 둑이 일부라도 열릴 경우 전체 제재 체제에 미칠 영향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예외 사유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일단 조금씩 해제되면 미국과 중·러 간 대립이 지속하는 현 상황에서 재도입은 어려울 것이다.
정부가 강력한 ‘대북 제재 유지’와 안보리 결의의 이행 확보를 위한 국제 공조 강화를 국정과제로 설정한 만큼, 미국·유럽연합(EU)·일본 등 우방국들과 공동보조 아래 미 행정부와 의회의 제재 정책 추이도 보아가며 종합적 전략하에 추진될 필요가 있다.
다섯째, 비핵화의 최종 목표에 대한 한·미 공동 입장을 일관되게 유지할 필요가 있다. 북한의 협상 복귀와 관계없이 북한은 핵 보유를 미국의 적대시 정책의 산물로 주장하며, 주한미군 철수, 핵우산 철폐를 비핵화 조건으로 연계하고 있다. 미국과의 협상도 핵보유국 간 핵군축 협상으로 몰고 가려 한다. 이러한 현실에서 확고한 한·미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우리의 ‘담대한 구상’과 미국의 대북 전략을 동조화해야 한다. 그래야 북한의 핵 보유 셈법을 변화시킬 수 있다. 지난 1일부터 오는 26일까지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핵확산금지조약(NPT) 평가회의 계기에 한·미 등 우방국들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북핵 폐기’(CVID)를 모처럼 역설한 것은 이런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여섯째, 격화하는 신냉전적 국제질서 전개와 북한의 공격적 핵전략에 따른 추가적 대비가 필요하다. 미·중, 미·러 대립 심화, 북·중·러 결속은 비핵화 협상 재개와 북핵 폐기 전망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한·미·일과 EU 중심의 자유주의 연대는 기본이지만 북·미 협상, 남북 협상, 6자회담, 기타 방식(스냅백을 포함한 이란 방식 등) 중 어떤 방식이 북한 비핵화 목표를 달성하는 데 유리할지 고민이 필요하다. 비핵화를 지지했던 국가들이 스스로 약속을 깨거나 북한 핵무장을 방조하면서 더욱 복잡해진 고차방정식을 잘 풀어내야 한다.
한·미 전략 동맹의 최대 도전
1차 북핵 위기 시 북·미 제네바 협상 과정에 참여했던 우리 대표단의 젊은 외교관이 최종 합의 문서에 대해 “오늘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룬 셈이 되었네요”라고 개인적 소감을 밝힌 게 지난 30년간 뇌리에서 사라진 적이 없다. 이후 30년간 한·미는 북핵의 근본적 해결을 지향해 왔지만, 결과는 이와 거리가 멀었다.
이제 핵물질뿐 아니라 수십 개 이상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선제공격까지 운운하는 북한으로부터 오는 실존적 위협을 상황 관리적 합의로 끝낼 수 없다는 게 이번 구상을 제시한 정부의 고민일 것이다. 한·미는 과거에서 많은 교훈을 얻은 바 있다. 김여정 담화 이후 북한의 행보와 전략을 염두에 두면서 이번 구상을 긴 호흡으로 지속해서 보완·조정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윤 정부와 바이든 행정부가 겹치는 향후 수년은 한반도와 인도태평양 지역의 평화 안보에 결정적 기간이 될 것이다. 북한의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대비하면서 핵 위협과 재래식 도발을 억제할 수 있는 외교안보 노력을 총동원해야 한다. 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격상된 한·미 동맹의 최대 도전이다.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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