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호영의 한반도평화워치] 중·러 압박에도 자유주의 가치 명확히 지켜나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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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미국은 1882년 5월 22일 조·미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따라서 올해로 한·미 관계는 140주년을 맞았다. 140년의 초반은 소원한 만남이었고 후반은 긴밀한 만남이었다. 후반의 만남은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에 기초한 만남이었다. 이것이 한·미 관계를 규정하는 중요한 특징이다. 그러한 면에서 2차 대전 후의 한·미 관계는 세 차례의 중요한 전환점을 겪어 왔다.
첫 번째 전환점은 한국전쟁과 이어 체결된 한·미 상호방위조약이었다. 소련군의 38선 이북 진주 이후 북한은 공산주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한 체제 구축을 신속히 진행하였다. 반면 남한은 사상과 이념의 혼미를 거듭하였고, 이것이 군대를 비롯한 국가 체제 정착을 어렵게 만들었다. 북한은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소련과 중국의 비호 아래 남침을 감행하였다. 한국전쟁이 남긴 상처는 너무나 컸다. 당시 남북한을 합쳐 약 300만 명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당시 남북한 인구의 10%에 해당했다.
한·미동맹 기본으로 일본·호주·뉴질랜드·나토와의 협력 강화해야
미·중 사이서 우리 위치 정하자는 주장은 ‘동맹의 방기’로 이어져
대북 대화 창구는 열어두되 한·미 억제력 강화 게을리하면 안 돼
이러한 참상을 겪은 남한은 한국전쟁 휴전과 함께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도 국가로서의 기본 가치에 대한 혼란을 겪던 우리나라는 마침내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인권, 법의 지배를 기초로 하여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를 만들어 냈다. 이러한 가치의 선택은 대한민국을 놀랍게 변모시켰다. 한국 경제는 1980년대 3저 시대를 거치고 시의적절한 무역·투자·금융 자유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성취를 이루어냈다.
북방 외교로 외교·경제 지평 확대
민주화와 인권 역시 놀라운 변화를 겼었다. 필자가 1978년 외교관 생활을 시작하면서 처음 근무한 부서가 미국과의 양자 관계를 다루는 곳이었다. 당시 미국이 한국에 대해 갖고 있던 관심사 중 하나가 인권 문제였다. 그러던 것이 87년 개헌 이후 인권 문제는 점차 우리 외교를 주눅 들게 하는 현안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88년 개최된 서울올림픽은 이렇게 짧은 시간에 경제 발전과 민주적 제도 정착을 이루어 낸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세계에 알리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우리에게 두 번째 찾아온 전환점이 냉전 종식이었다. 80년대 말까지 우리나라는 구공산권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가 모두 단절된 반쪽 외교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헝가리·체코·폴란드·슬로바키아를 시작으로 구소련, 중국 등 모든 구공산권 국가와 수교함에 따라 우리나라의 외교·경제 지평은 전 세계로 확대되었다.
냉전 종식이 갖는 또 하나의 의미는 자유주의적 국제질서가 전 세계로 퍼졌다는 점이다. 냉전 기간 중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 정치·군사적으로 대립했던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들까지 앞다투어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에 합류하게 되었다.
폴란드는 1996년 11월 우리나라보다 한발 앞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당시 폴란드 외교장관의 가입 연설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OECD 가입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것이 유럽공동체(EC·유럽연합 EU의 전신), 나아가 나토 가입의 사전 단계임을 선언했다.
시장 분절화와 공급망 장애는 한국에 도전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의 확산은 우리나라에 또 한 차례 도약 기회를 제공하였다. 경제적으로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 7개국밖에 없는 ‘3050클럽’(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인구 5000만 명 이상)의 일원이 되었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주요 7개국(G7)을 대체하여 국제 경제 조정 역할을 해 온 주요 20개국(G20)의 핵심 국가로 활동하였고, 핵안보정상회의와 글로벌보건안보회의(GHSA) 등에서는 미국·네덜란드와 함께 국제 트로이카 역할을 했다.
우리는 이제 세 번째의 전환점을 마주하고 있다. 지난 70년간 우리나라의 경제·정치·국제적 위상 상승을 가능하게 하였던 자유주의적 국제질서가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미·중 전략경쟁,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개발 등은 이러한 도전의 대표적 양상으로 거론된다. 무역·기술·에너지·자원 시장의 분절화와 공급망 장애는 높은 해외 의존도를 가진 우리 경제에 큰 도전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러한 국제질서의 도전이 구조화·장기화할 전망이다.
복합 위기의 한가운데 서 있는 우리나라는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첫째,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를 유지·강화하기 위한 국제적 노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미 동맹이 기본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이에 더하여 인도·태평양 지역의 일본·호주·뉴질랜드, 그리고 나토와의 협력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
지난 6월 말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의 한국 참여는 안보·경제 복합 위기 상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가치 체계를 같이하는 국가와의 관계를 더욱 심화하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하였다. 같은 이유에서 회의 기간 중 개최된 한·미·일 정상회의도 시의적절하였다.
둘째, 가치를 같이하는 국가와의 관계를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이해하는 사람들도 이것이 중국·러시아와의 관계에 부담을 줄 수 있는 만큼 새 정부가 이를 해소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우리나라의 지정학적·지경학적 지위를 볼 때 중국·러시아와도 상호 이익이 되는 긴밀한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 발전은 우리나라의 기본적 가치 체계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전략적 명확성’이 필요하다.
동맹 사이에 사전에 선 긋는 건 문제
특히 미·중과의 관계에서 어느 한쪽에만 치우쳐서는 안 되고, 그 중간의 어느 지점에 우리의 위치를 설정하고 그 기초 위에서 양국과의 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다. 동맹은 상대방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기초로 한다. 사전에 동맹 내부에 이해 타산적인 선을 그어놓자는 주장은 상대편에게도 같은 태도를 갖게 해 결국 ‘동맹의 방기’로 연결될 수 있다.
동맹 간에도 모든 사안에 입장이 같을 수는 없다. 그런데 이것을 사전에 선을 그어서 해결하자는 것은 현실적 대안이 아니다. 필자가 주미대사로 근무하는 기간에도 그런 문제들이 있었다. 중국이 2014년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설립을 제안했을 때의 일이다. 우리나라는 AIIB 가입을 희망하였고, 미국은 중국 의도에 대하여 깊은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필자는 미국 측과의 협의에서 객관적으로 AIIB 설립을 막기는 어려운 상황인데, 한국이 참여하는 것과 그 반대의 경우 어느 쪽이 미국의 관심 사항을 반영하는 데 더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지를 끈질기게 설명하였고, 마침내 미국은 이에 대한 이해를 표시하였다. 당시 미국이 한·미 동맹에 대한 우리나라의 입장을 전적으로 신뢰하였기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북한엔 외교·제재·억제력 3개축 대응해야
셋째, 우리 안보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인 북한 핵 문제를 포함해 남북한 관계는 원칙에 입각한 의연한 대응이 필요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후 처음 맞이한 광복절 경축사에서 북한에 대한 ‘담대한 구상’을 밝혔다. 북한이 비핵화에 대한 실질적 태도 변화를 보인다면 비핵화 이전에라도 북한에 대한 식량·인프라·금융 지원을 시작할 수 있다고 하였다. 북핵 문제를 외교를 통하여 해결하여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기본 입장이고 윤 대통령이 이러한 의도를 분명히 밝힌 것은 의미가 있다.
문제는 이에 대한 북한의 호응을 유도해 내기가 대단히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북한은 90년대 초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이 개혁·개방을 선택하는 와중에도 이를 거부했다. 이는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핵무기를 개발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 이후 제네바 합의, 6자 회담, 2018년의 짧은 해빙기가 있었지만, 북한은 핵·미사일 개발을 중단한 적이 없다.
이러한 엄중한 현실을 직시하고 외교·제재·억제력을 3개의 축으로 하는 의연한 대응을 해 나가야 한다. 남북한 교류와 긴장 완화를 위해 대화의 문을 항상 열어 두어야 하나, 북한이 핵 교리를 억제력 중심에서 선제 타격으로 바꾸고, 전술 핵무기의 일선 부대 배치까지 의심되는 현 상황에서는 한·미 간에 억제력 강화를 게을리할 수 없다.
안호영 북한대학원대학 총장·전 주미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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