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림 연세대 교수] 한·중수교 30년(II): 가분수 국가를 넘어
본문
한·중수교 30년을 맞아 제기한 ‘가분수 국가’라는 언명(중앙시평 2022년 8월 24일자)에 대해 많은 문의와 질문들이 있었다. 간단하게 말해 가분수 국가란 몸집은 큰데 생각은 왜소한 나라를 말한다. 또는 국력은 제국 규모이나 사고는 소국 수준을 지칭한다.
오늘날 중국은, 국력은 세계 양대 제국 규모로 발전하고 있으나 사유체계는 초기 국민국가 단계로 후퇴하고 있다. ‘중화민족’과 ‘민족주의’와 ‘중화민족 부흥’에 대한 정부와 민간, 언론과 학문의 넘치는 담론들은 천하·제국·질서·문명을 자임하고 지향하는 중국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최고 번영’ 단계에 왜 ‘망국 시기’의 울분과 패배 상황을 대표하는 사유체계를 호출하여 전면화하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 실제로 반(半)식민지로의 전락 시점이 잘 보여주었듯, ‘중화’와 ‘민족’의 만남은-20세기 벽두 량치차오(梁啓超)의 첫 제기 이후-오히려 중국 현실에 맞지 않는 부정적 조합이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인 것이다.
개혁개방 이래 현대 중국의 경제·군사·기술·국력의 비약적 발전은 실로 놀랍다. 과거 찬란했던 중화제국의 부활에 걸맞은 수준을 거의 복원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훗날 중국의 발전과 후퇴의 결정적인 기로와 요인을 꼽는다면 그것은 바로 ‘오늘날’, 특히 오늘의 ‘사상체계’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국가의 도약에 맞추어 너른 보편과 세계공통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거꾸로 갖은 ‘중국 특색’과 ‘중화’와 ‘민족’의 수식어를 앞에 갖다 붙이는 특수성과 폐쇄성을 말한다.
여러 제도와 관념이 거의 전부 그러하다. 그것은 로마와 중국, 유럽과 미국을 포함한 문명선도의 길들이 아니었다. 반대로 근대 중국을 포함해 독일·일본·소련 등 멸망한 제국들의 길이었다. 특히 역사를 깊이 들여다볼 때 자폐적 대국주의는 전통 중화제국들을 단명케 한 핵심 요인이었다. 인류 공통의 자유·인권·주권·평등·복지·평화의 규범과 가치는 개별국가적 특색을 넘는 보편성을 띠고 있기에 넓고도 오래도록 생명력을 갖는다.
따라서 ‘중화 민족주의’를 지양한다고 하여 ‘중화 제국주의’를 추구해서도 안된다. 현대 중국을 건설한 마오쩌둥이 소련을 명백한 ‘제1세계’로 규정한 근거를 오늘의 중국이 수용하고 반복하는 자기 모순을 범하면 안된다. 미·중 대결을 명분으로 제1세계의 길을 가는 것은 스스로 타도하고자 했던 소련 대국주의와 똑같은 것이다. 새로운 천하체제, 중화제국, 유교질서에 대한 각종 담론들도 마찬가지다. 과거 동서 분리의 시대에 잠시 작동했던 원리를 세계가 하나 된 지금 다시 들고나온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중국특색을 안고 넘어, 무엇보다 인류공통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른 길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중국이 제기하고 있는 인류 운명 공동체 언술과 정책은 말 자체는 옳고 방향도 맞다. 그러나 주변 국가에 대한 안보·평화·영토 문제를 보면 그것 역시 실제 현실과는 다르다. 즉, 중국의 주변 국가와의 평화적 공존 문제다. 중국은 냉전·탈냉전시대 모두에 걸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대면하고 있는 거의 모든 주변국가와 갈등을 치렀고, 또 치르고 있다. 거기에는 직접 충돌과 전쟁 개입과 영토 분쟁을 포함한다.
불행하게도, 중국 내부문제로 치부하고 싶은 타이완 문제나, 제국주의 시대의 유산이라고 주장하는 일본과의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 문제만이 아니다. 둘에 더해, 중국은 러시아·인도·베트남·한반도·남중국해 등에 걸쳐 국경 충돌·영토분쟁·전쟁개입을 반복해왔다. 주변 거의 모든 나라와 충돌한, 충돌하고 있는 나라는 근대 이후 특히, 현대세계에 들어서는 중국이 유일하다. 한두 나라가 아니고 거의 모든 주변국가와 분쟁하였거나, 분쟁 중이라는 점은 자기 영토에 비해 작고도 작은 경계 지역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행태를 잘 보여준다. 요컨대 인류 운명공동체를 말하기 이전에 주변국가와의 평화공동체를 먼저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단초는 단연코 가분수 국가를 극복하려는 노력으로부터 발원할 것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점은 과거 제국들의 붕괴에 대한 역사의 일정한 반복 법칙이 주는 냉혹한 교훈이다. 제국의 붕괴는 주로 내부 문제이거나 주변 경계문제로부터 비롯되었다. 대국 대 대국, 제국 대 제국의 직접적인 대결 구도는 언제나 제국 붕괴과정의 저변에 흐르거나 깊이 숨어있었다. 생존이건 붕괴이건 또는 가교이건 분할이건, 경계의 매개적 역할을 계기로 심부 요인들은 비로소 겉으로 표출된다. 이것은 고대와 현대의 제국들에 대한 깊은 연구들의 거의 공통된 결론이다.
경계국가 한국보다 훨씬 더 많은 내전과 전쟁, 훨씬 더 짧은 왕조와 제국 생존의 주기를 보여준 중국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한·중(한·소)수교는 세계 냉전대결과 제국 질서의 절대 전초이자 절대 경계였던 한국이 어떻게 세계냉전과 세계질서 해체의 선두에서 역할할 수 있는가를 증거한 쾌거였다. 오늘의 중국이 가분수 국가를 넘어 한국 및 세계와 함께 인류 보편의 가치와 질서를 구축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