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경 칼럼] 대통령은 율법과 정죄의 내전을 끝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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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 전 잘나가는 검찰 간부가 내게 말했다. “법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입니다. 손볼 사람은 어떻게든 손봤고, 봐줄 사람은 끝까지 봐줬어요.” 법을 흉기로 타락시켰다는 고백이었다.
박주선 전 국회부의장(현 대한석유협회 회장)이 그 증거다. 그는 서울대 법대를 나와 사법시험에 수석합격한 수재였고, 최고의 특수부 검사였다. 그러나 친정인 검찰의 표적수사로 네 번 구속됐고, 모두 무죄로 풀려났다. 세계 유일의 기록이어서 기네스북에 올랐다. 수사했던 후배 검사들은 “아무 잘못이 없으니 풀려날 것”이라고 했지만 결과는 매번 달랐다. 검사는 “윗선의 압력 때문”이라고 실토했다. 퇴임한 ‘윗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나 “이럴 수 있느냐”고 항의했고, “미안하다”는 사과를 받아냈다.
이원석 검찰총장이 김건희 여사 명품백 수수 의혹 사건을 제대로 수사하겠다고 한다. 용산 대통령실은 불만을 느낄 수 있다. 김 여사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사건 수사를 지휘 중인 송경호 중앙지검장은 경질설에도 불구하고 김 여사 소환조사 의지가 확고하다. 제주지검장이었던 이원석은 윤 정부 들어서 단숨에 대검 차장으로 승진했고, 3개월 만에 총장으로 발탁됐다. 문재인 정부 윤석열 검사의 초고속 출세 경로와 판박이다. 이런 윤석열 정부의 검찰 황태자가 정권을 정조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총장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정권을 심판한 총선 민심은 의혹을 철저히 규명하자는 것이다. 검찰 선배들과 젊은 검사들도 “여기서 정권의 눈치를 보면 검찰이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윤석열 총장이 조국 일가를 상대로 혹독한 수사를 벌이면서 문 정권과 일합을 겨룬 끝에 대통령이 된 경로가 이 총장에 의해 되풀이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윤 정권에는 악몽 그 자체다. 민정수석실을 부활시키고 검사 출신을 수석과 비서관에 꽂았지만 이원석 검찰의 기세를 꺾기는 쉽지 않다. 이 총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직접 조사해 구속시킨 경력도 있다. 그의 퇴임일은 9월 15일. 남은 4개월 동안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 전방위로 칼을 휘둘러온 윤 대통령의 과보(果報)다. 이런데도 특별감찰관 임명과 제2부속실 설치 소식이 들리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도 사법 리스크에서 자유롭지 않다. 진행 중인 여러 재판 중 단 한 건에서라도 유죄가 나오면 대통령 피선거권이 제한된다.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도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되면 바로 수감된다.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과 원희룡 전 국토부 장관도 자녀 입시, 양평 특검에서 지옥을 경험할 수 있다. 차기 유력주자들이 모두 ‘서든 데스(sudden death)’의 위험에 처해 있다. 적이 죽어야 내가 사는 지옥에서 협치와 타협은 꿈같은 얘기다.
100년간의 미국 소득배분 추세 그래프는 지금이 1930년대 대공황 시기와 비슷한 상태임을 알려주고 있다. 빈부격차가 최악이다. 민주주의가 추락하고 포퓰리즘이 극성이다. 전 세계가 너나없이 직면한 현실이다. 유럽과 중동에서 전쟁이 진행 중이고, 다음 차례는 대만이 될 것이라고 한다. 핵으로 무장한 북한과 대치 중인 한국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내부 통합, 양극화 해소, 성장동력 확충이 이뤄져야 하나가 돼서 나라를 지킬 수 있다.
만인에게 공평해야 할 법이 권력자의 도구, 악마의 흉기가 되면 안 된다. 이건 ‘법의 지배(rule of law)’가 아닌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를 의미한다. 윤 대통령에게도 책임이 있다. 정적과 그 가족을 집요하게 압박했다. 이제 자기 차례가 되니 김 여사·채 상병 특검을 거부하고 권력의 방패로 성을 쌓고 있다. 이게 공정하게 보일까. 2500년 전 플라톤은 인류 최초로 ‘법의 지배’를 거론했다. “법률이 일부의 사람들을 위한 것일 경우에, 이 사람들을 우리는 도당이라 말하지… 법이 휘둘리고 권위를 잃은 나라에는 파멸이 닥쳐와 있는 게 보이니까요.”(『법률』 플라톤) 윤 대통령은 자신과 배우자를 향한 수사와 특검도 열린 마음으로 검토해야 한다. ‘법에 의한 지배’를 초래한 책임을 성찰하고 내부 통합을 이루는 출발점이다. 그토록 장담한 대로 결백이 입증되면 이보다 좋은 일이 또 있겠는가.
홍철호 정무수석은 “대통령은 국민들 눈물이 있는 곳에 계셔야 한다”고 건의했고 윤 대통령은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천만다행이다. 함석헌 선생은 “눈에 눈물이 고이면 그 렌즈를 통해서 하늘나라가 보인다”고 했다. 비명을 지르는 국민의 고통은 누구도 쉽게 해결하지 못한다. 그러니 이 지긋지긋한 대결에서 벗어나 지상에서 가장 힘든 이들에게 다가가 위로와 구제에 착수해야 한다. 천국에서 멀어지는 율법(律法)과 정죄(定罪)의 내전을 끝내는 길이다. 연민의 연대와 통합으로 향하는 순리이고, 대통령이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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