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민 한국외대 교수] 라인 사태 계기로 경제안보법 제정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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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라인 사태’와 관련한 다양한 뉴스와 여론 속에서 국민은 적잖은 피로감을 느꼈을 것이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가 해석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았던 이유는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기업 내부 속사정이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공개하기 힘든 복잡한 사정과 셈법 속에서 현재는 네이버의 입장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정부도 이에 맞춰 적극적으로 일본 정부에 목소리를 내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혀가는 것 같다. 다만 세계사적 변화의 한가운데서 이번 사태가 단지 일개 기업의 문제로 끝나서는 안 되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이번 라인 사태를 계기로 정보 유출을 대하는 한·일간 미묘한 입장차가 드러났다. 우리 언론은 작년 11월 50만 건에 달하는 개인정보 유출이 이번 사태를 촉발했고, NTT나 페이스북의 정보 유출에 비하면 약과라는 식의 보도가 줄을 이었다. 그러나 잘못을 저지른 다른 기업도 있는데 유독 처벌이 가혹하다는 주장은 사건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다. 라인의 정보 유출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특히 2021년 3월 중국 위탁업체에서 발생한 개인정보 유출 사건은 일본 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2017년에 제정된 중국 국가정보법에 의해 중국 정부가 중국 내 모든 기업 정보를 열람할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관점에서 총무성의 두 차례 행정지도나 이례적 지분 조정 언급은 이해하기 힘들다. 일본 정부 행보를 이해하려면 이번 라인 사태를 경제안보 이슈와 결부 지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2022년 5월 제정된 경제안전보장추진법에 기반해 2023년 11월 16일 라인야후를 특정사회기반사업자로 선정했다. 이에 선정되면 외국에서 설비를 도입하거나 업무를 위탁할 때 반드시 정부에 신고해야 한다. 한마디로 국가 안보와 관련된 중요 기업들은 정부의 철저한 관리, 감독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라인야후에 주어진 6개월의 유예기간이 5월 16일 끝났다. 이례적인 두 차례 행정지도는 새로운 프로토콜의 실시를 앞둔 경고였을지 모른다.
작년 8월 캠프 데이비드 선언에서 한·미·일 삼국이 안보협력을 이야기한 지 8개월 만에 마치 뒤통수를 치듯 일본이 경제안보를 핑계로 ‘라인 강탈’을 시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한·일 관계가 너무 급격히 개선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정권에서 한·일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는 속에서 일본은 경제안보법을 제정하고 중요 산업을 지정하는 등 후속 조치를 계획대로 진행해왔다. 그런데 갑자기 한·일 관계가 개선되면서 말뿐인 안보협력의 모순이 드러난 것이다.
이번 라인 사태 이면에는 ‘떡 본 김에 제사 지내고 싶었던’ 소프트뱅크의 본심도 작용했다. 잘 알려져 있듯 네이버와 소프트뱅크는 페이(pay) 전쟁으로 치킨게임을 하다가 미·중 빅테크 기업을 견제할 목적으로 협력을 선택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시너지 효과는 크지 않았고, 메신저 기능을 제외하고 두 회사의 중복된 사업 영역은 계속 충돌했다. 그러던 중 챗GPT 열풍이 불자 AI를 둘러싸고 두 기업의 동상이몽이 시작되었다. 소프트뱅크는 네이버가 개발하던 AI에 투자할 계획을 접고, 10조 엔을 투입해 AI를 자체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때마침 일본 정부도 소프트뱅크의 AI 개발을 위한 수퍼컴퓨터 정비에 421억 엔을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데이터 주권을 둘러싼 글로벌 전쟁에 일본의 민관이 힘을 합쳤다.
우리 정부의 할 일이 네이버를 지키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계사적 흐름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시간에 국민 기업 네이버를 뺏길 수 없다는 식의 분노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루빨리 정부는 우리의 경제안보법을 구체화해야 한다. 한·일 디지털협정을 포함해 디지털 우방국도 늘려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데이터 안보와 디지털 패권 경쟁에 우리 기업들이 희생양이 되지 않도록 지원을 체계화해야 한다. 국제사회는 총성 없는 전쟁이 한창인데 사이버 영토 침략이니, 믿었던 손정의의 배신이니 하는 감정적 토로만 들린다. ‘라인 일병 구하기’에 매몰돼 우리가 전쟁 중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창민 한국외대 융합일본지역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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