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훈 중앙대 교수] 6·10 정신으로 민주주의 되살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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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세대에게 6·10은 가슴 벅찬 기억으로 남아있는 날이다. 1987년 6월 10일 서울시청 앞 광장은 수십만 민주화 시민들로 터질 듯했다. 뜨거운 날씨 속에 흰 셔츠와 넥타이 차림의 수십만 회사원, 시민, 대학생의 민주화 함성은 세상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날 오후부터 본격화한 민주화 물결은 결국 군부 집권당의 6·29 선언으로 이어지면서 한국 민주주의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오랜 어둠은 걷히고 빛과 희망이 압도적이었던 6월이었다.
그로부터 37년, 민주화의 꿈과 희망은 누추한 현실로 주저앉았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빈사 상태다. 공천 과정이 편법, 반칙, 막말, 모욕으로 얼룩졌지만,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총선에서 압도적 의석을 얻었다. 민주주의의 생명줄인 제도와 규칙은 거대 야당에서 무의미해졌다. 대통령실과 여당의 국정운영 역시 민주주의의 근간인 법치와는 거리가 있다. 진영 정치의 폭력적 살벌함은 민주주의 붕괴 직전의 역사적 사례들이 보였던 증세들을 닮아가고 있다.
오늘 필자가 민주화 역사 이야기를 풀어놓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한국 정치의 병은 너무 깊어서 한두 가지 제도개혁, 이를테면 요즘 제기되는 대통령 중임제 개헌이나 지구당 부활 등으로 회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사람들의 태도와 의식이 그대로인 상태에서 도입되는 새로운 제도는 고작해야 어느 정치세력의 이익 실현 수단에 그치고 만다.
둘째, 제도 변경에 크게 기대할 것이 없다면 우리가 기댈 희망은 역사의 유산이다. 6·10에서 6·29, 그리고 87년 대통령 선거로 이어지던 과정을 돌아보면 오늘날 위기 타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필자는 믿는다. 하나는 민주주의 전환 과정에서 발휘된 타협의 정신, 또 하나는 진영 내 강경파를 제어하면서 타협을 주도했던 온건파들의 정치력이다.
먼저 한국 민주주의 탄생에 타협의 정신이 어떻게 작용하였는지 돌아보자. 타협은 6·29에서 그해 12월 대선까지 이어지는 체제 이행 과정을 이끌어간 규범이었다. 타협의 첫 계기는 6월 시민 항쟁의 요구를 대폭 받아들인 6·29 선언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민주화 시민들이 열망해 온 대통령 직선제 개헌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아울러 민주화 지도자 김대중 씨의 사면·복권과 대선 참여가 가능해짐으로써 민주적 경쟁이 실질화되었다.
권력을 쥐고 있던 권위주의 세력 입장에서는 힘을 앞세워 시민들과 충돌하거나 혹은 시민들에게 전면적으로 굴복하는 선택지도 있었겠지만, 6·29 선언을 앞세워 타협의 길을 선택하였다. 민주화 세력 역시 민주화 조치들을 수용하고 이후 직선제 선거가 치러질 때까지의 불확실한 과정을 군부 정권이 관리하는 데에 합의하는 포용적 선택을 함으로써 타협의 큰 틀이 성립되었다.
뜨거웠던 민주화 열기가 양 진영의 타협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각 진영 내 온건파들의 역량이 결정적이었다. 당시 민주화 세력은 다양한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학생, 종교계, 노동운동계, 급진운동계, 그리고 광장에 나섰던 시민들. 이들 중에 타협의 민주화를 거부하는 목소리도 작지 않았다. 하지만 민주화 세력을 이끄는 상징적인 두 인물, 김영삼과 김대중은 민주화 진영 내의 강경파를 달래기도 하고 으름장도 놓으면서 타협의 기조를 유지하였다. 동시에 이들은 군부 정권 내의 온건파가 입지를 유지할 수 있도록 적절한 양보를 내놓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양 김 씨는 새 6공화국 헌법에 군부의 정치 중립 조항이 명시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고집하지는 않음으로써 상대측 온건파가 숨 쉴 공간을 열어 주기도 하였다.
강경파와 온건파가 팽팽히 맞서던 군부 정권의 내부 사정 역시 복잡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노태우 후보 중심의 온건파는 다가오는 서울 올림픽 개최의 중요성, 물리적 충돌이 빚을 파국적 결과 등을 내세워 강경파를 설득, 회유, 압박하는 데에 성공하고 타협의 끈을 유지하였다.
정리하자면, 민주주의의 붕괴 과정에 대한 통찰 하나가 요즘 필자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민주주의가 단번에 쓰러지는 것은 아니다. 수백, 수천 번 거듭된 상처를 입으면서 쓰러진다.”
오늘도 여의도 국회에서는 한국 국회의 타협 관행을 무너뜨리는 거대 야당의 독주가 지속되고 있다. 소수당에게 법사위원장의 요직을 내주던 포용과 공존의 관습은 내팽개쳐지고 있다. 또한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시도 이후 설익은 탄핵의 칼을 언제든 꺼낼 듯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 대통령제는 만신창이가 되어 가고 있다.
37년간 상처에 상처가 더해지며 비틀거리는 한국 민주주의를 바라보면서, 오래전의 꿈을 다시 꾼다. 강경파의 주문에 춤추기보다 이들을 제어하고 온건파에 귀 기울이는 리더는 어디에 있을까? 눈앞의 정치적 이해를 위해 법을 바꾸고 당헌, 당규를 바꿔치는 정치를 종식할 인물은 어디에 있을까? 그해 6월 온건파들 간의 대타협에 박수치던 민주화 시민들은 다 어디로 흩어졌을까?
장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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