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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림 연세대 교수] ‘자멸 국가’의 물줄기를 돌리자

By 한반도평화만들기    - 24-05-17 10:40    824 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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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해체 이후, 인류 절반을 좌우했던 소련 제국의 멸망에 관한 성찰들은 그 붕괴의 원인이 전쟁 같은 외부 요인이 아니라 철저하게 내부 요인 때문이었다는 점을 규명한 바 있다. 인간 자유와 자아실현의 부재, 이념·파당을 넘는 국가 전체 의제의 방기, 국가 기제의 작동 불능, 내부 분열과 파쟁으로 인한 최후 충돌 등이 그런 내부 요인들이다.

실제 거대 제국이 무너지는 광경은 (외부인들에게는) 일대 충격인 동시에 역사적 장관이었다. 한 시대 앞서, 최고의 경제학자 케인스는 평화에 관한 저작에서 “어떤 사회질서든 자신의 손에 의하지 않고는 절대 소멸하지 않는다는 말은 역사적으로 진실일 것”이라며 인간 공동체 멸망 원인의 일단을 진단한 바 있다. 


소련의 사례와 케인스의 견해가 아니더라도, 인류 역사와 지혜는 제국 및 국가 소멸의 근원에 대해 합의에 가까운 경로와 해석을 보여준다. 로마제국의 붕괴 사례는 그 정수요 고갱이다. 근대 권력분립과 민주공화국 사상을 정초한 선현은 권력의 독임과 전제, 빠른 발전과 번영이 로마 몰락의 한 원인이었음을 주장한다. 현대 한국의 궤적에 비추어 로마 몰락이 빠른 과업 성취의 산물이라는 지적은 섬뜩하다.

로마제국 쇠망에 대한 대저작을 남긴 역사가에 따르면 자연과 시간, 외부의 침략과 파괴, 자원과 물질의 남용이 아니라 내부 불화와 적대가 가장 치명적인 쇠망 원인이었다. 외부 전쟁에는 승승장구했던 로마제국도 내부 분열이라는 적에는 패배했던 것이다. 법의 전제가 불화와 파괴를 완성했다. 조화와 균형 대신 항상 처벌과 저항을 가르기 때문이다. 시간도, 야만족도 하지 못한 로마 파괴와 멸망을 초래한 것은 로마인 자신들이었다.

현대 사회과학을 정초한 최고 학자에 따르면, 장엄한 고대 문명의 몰락이라는 로마 붕괴의 드라마는 외부의 일격으로 갑자기 도래하지 않았다. 로마의 본질과 정신 내부로부터의 변질에 기인했다. 외부 요인은 오랫동안 진행되던 내부 요인에 종지부를 찍었을 뿐이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물질문명과 기술 수준, 국가 경제와 국력 면에서 세계 한 자릿수 등위 또는 선두권에 있다. 몇몇 첨단 상품·기술·문화·경제·국방·과학·의료 분야의 세계 순위는 10위권은 물론 4~6위, 심지어 1~3위를 차지한다. 이 땅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래 오늘처럼 한국 문명의 위상과 넓이가 세계 앞자리에 선 적은 없었다.

여러 국제기구에 따르면 한국은 산업화 시작 이후 국가 경제나 1인당 소득의 증가 속도에서 세계 최고를 기록한 바 있다. 놀라운 성취다. 그들은 한국을 산업화 시작 한 세대도 안 되어 ‘제 1세계’에 진입한 국가로 분류한다. 모든 나라가 같이 벌인 경주에서 한국은 추월을 거듭하며 질주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이 바친 땀과 희생은 우리 모두를 숙연하게 한다. 어떤 종합 국력 지표에서는 한국이 일본과 프랑스를 연속으로 제치고 있다. 국제 체제 이론에 따르면, 한국은 ‘제국’과 ‘국가’ 사이 ‘준(準)제국’의 위상에 올라섰음이 분명하다. 근대 시기의 영국·프랑스·독일·일본과 비등하거나 오히려 넘어서는 위상이다.

그러나 이미 여러 차례 강조하였듯, 인간과 생명의 부정적 지표에서도 한국은 단연 앞자리에 선다. 출산도, 자살도, 청년 사망도, 노인빈곤도, 인구소멸·지방소멸·국가소멸 지표도 그러하다. 자기 보존과 자기 연장을 근본 존재 이유로 삼는 인간과 국가가, 어떤 외부 침략이나 요인도 없이, 스스로 자기 생명과 자기 연장 중단의 경로를 가고 있다.

오히려 외부와의 전쟁에서는 훌륭히 나라를 지켜왔던 우리다. 그런 나라가 민주주의와 자유, 경제와 문명의 절정에서 ‘한국 정점’을 말하는 혹독한 역설에 직면하고 있다. 자멸적 선택, 자멸 국가 경로다. 소련과 로마처럼 청나라 멸망의 단초 역시 제국의 절정에서 비롯되었다는 통찰은 오늘의 한국인의 모골을 송연하게 한다.

한국은 여러 국제 비교 지표에서 보듯 내부 갈등에서 세계 선두권이다. 제국과 나라를 파멸로 이끄는 최고 원인인 내부 갈등을 극복할 제도와 리더십, 능력과 지혜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아니다. 반대다. 상대 진영에 대한 증오와 청산 의지 때문에 그런 제도나 인물을 향한 이성과 열정을 애당초 갖고 싶지 않은 것이다. 개인과 가정도 마찬가지지만, 스스로 갈라져 지탱한 나라는 없다. 스스로 갈라져 발전한 나라는 더욱 없다. 종교와 정치와 역사의 일관된 근본 가르침이다.

인간과 생명, 나라와 전체 문제에 관한 한 자멸로 달려가는 물줄기를 반드시 돌려야 한다. 문명의 멸망에 관한 인문역사와, 생명체의 멸종에 대한 자연과학의 최고 지혜들은 놀랍게도 결론이 같다. 진리라는 뜻이다. 한 번 소멸의 길로 접어든 문명과 생명체들을 되돌린 사례는 극히 적다. 아니, 거의 없다. 자멸은 말할 필요도 없다. 치료제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아직 너무 늦지는 않았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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