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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승의 퍼스펙티브] 전환점에 선 한국 외교…신중함이 조급함을 이긴다

By 한반도평화만들기    - 25-05-28 12:04    281 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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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질서 재편과 한국 외교정책의 방향


발트해 연안의 작은 나라, 하지만 안보의 최전선에 위치한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에 유럽과 미국, 인도·태평양 각지에서 여러 정상들, 국방·외교장관들, 그리고 언론인과 학계의 전략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를 한 달여 앞두고 열린 2025년 레너트 메리(Lennart Meri) 국제안보회의는 글로벌 지정학의 기류를 가늠하는 자리이자 동맹과 균열, 질서와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공간이었다.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치열하게 진행된 논의는 선택의 기로에 선 국가들에 대한 시험장이기도 했다. 유럽과 한국은 전략적 자율성을 모색하면서도 미국과의 협력 기조를 유지하려는 공통된 입장을 공유하고 있다. 


한국 외교는 중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 대선이 임박했고 외교정책의 방향도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그러나 이는 정치 일정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이 마주한 도전은 국제질서 자체의 재편이라는 거대한 흐름과 맞닿아 있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는 기존 국제질서의 구조적 불안정을 더욱 가속하고 있다. 미국은 더 이상 전통적 동맹국에 충분한 신뢰와 비전을 제공하지 않는다.

유럽과 한국은 “언제까지 미국에 기댈 수 있는가”라는 공통의 질문을 직면하고 있다. 그 질문은 방위비 분담의 문제를 넘어, 미국이 여전히 “같은 세계를 보고 있는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불확실성을 담고 있다. 중국은 미국 중심 동맹의 균열을 노리며 ‘관여’의 논거를 강조하고 있고, 러시아는 흑해와 북극을 넘어 동북아까지 영향력을 다시 확장하려 한다.

이제 한국을 포함한 기존의 우방들은 전략의 재설계를 요구받고 있다. 미국 중심의 안보 구조는 ‘조건부 신뢰’라는 전제로 재해석되고 있고, 미국은 ‘위임된 보호자’가 아닌 ‘협조적 파트너’로 인식되어 간다. 관성에 기댄 외교의 시대는 지났다. ‘전략적 자율성’은 더 이상 수사가 아닌 실행 가능성을 묻는 언어가 됐다.

전략적 자율성과 외교적 조급함
하지만 전략적 자율성은 동맹과의 이탈이 아니라, 동맹을 재정의하고 새로운 연대와 자강을 통해 독자적인 선택지를 마련하려는 전략이다. 그리고 그 전개는 신중히 해야 한다. 한국에 있어서 만약 이 논의가 ‘친미냐, 친중이냐’는 이분법적 프레임에 갇히게 되면 전략적 신중함은 ‘외교적 조급함’으로 변질하고 만다.

조급한 변화는 불신을 부른다. 한국은 그간 외교 전략이 정권 교체와 함께 출렁이는 패턴을 반복해왔다. 보수는 한미 동맹, 진보는 평화와 자율성 중심의 메시지를 앞세웠다. 그러나 문제는 주요 파트너 국가들이 바라보는 예측 가능성의 부족이다. 외교는 단지 무엇을 하는지가 아니라, 어떤 국가로 보이는가에 달려 있다. 한 북유럽 외교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국은 다음 정부에서 또 방향이 바뀝니까? 우리는 누구와, 어떤 한국과 협력해야 합니까?”

자주 언급되는 ‘실용외교’도 사용 방식에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실용은 말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의 결과로 나타나야 한다. 실용을 외교의 슬로건으로 내건 순간, 주요 파트너 국가들은 그 국가의 전략적 방향성 부재를 감지하게 된다. 특히 동맹국이나 주요 우방국에는 ‘전략 없는 실용’이 불안의 시그널로 읽히기 쉽다. 특히 중견국에 있어 도덕성과 신뢰는 국력의 요소다.

외교는 메시지의 예술이다. 실용외교는 말이 아닌 조율되고 축적된 전략을 통해 읽혀야 하며 외교적 메시지는 신중함과 예측 가능성을 전제로 해야 한다. 한국에 관심을 갖고 함께 이야기를 나눈 여러 전략가의 조언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한국의 급격한 방향 전환은 주요 파트너 국가들의 신뢰를 흔들 수 있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신속한 변화가 아니라 신중한 진화다.”

한·미·일 협력은 외교적 자산
대다수의 서방 전략가들이 일관되게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한국의 전략 축이 있다. 바로 한·미·일 협력이다. 과거사 문제가 얽혀 있는 한·일 관계에도 불구하고, 한·미·일의 공동 행보는 정치·경제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일 관계의 회복은 단지 양자 간 개선에 그치지 않고, 대외적으로 한국 외교의 신뢰도와 효율성을 높이는 계기로 작용한다. 특히 유럽은 여기에 전략적 연계를 기대하고 있다. 트럼프가 불러온 지정학의 기후변화 속에서 한국과 유럽·일본·호주와 같은 중견국들의 창의적 협력은 새롭게 제기되고 있다.

한국의 대 유럽전략도 주목받는다. 한국은 단지 미국의 조력자나 군사 장비 제공국이 아닌, 새로운 유럽 안보의 협력 파트너로 부상하고 있다. 한국의 방산·디지털·사이버 역량은 유럽의 재무장 과정에서 상호보완적 자산으로 인식된다.

다음달 헤이그 NATO 정상회의에 인도·태평양 4개국(IP4)의 일원으로서 한국이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이러한 연계전략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만약 한국이 이 회의에 대한 참여를 주저한다면 글로벌 파트너십에서의 신뢰도 자체가 크게 흔들릴 수 있다. 신뢰를 줄 수 있으면 다음 행보의 폭이 넓어진다.

북·러·중 연대와 새로운 접점 모색
레너트 메리 콘퍼런스의 마지막 세션 ‘동맹·적, 그리고 이해관계’는 의미심장했다. 프랑스 르몽드의 실비 카우프만 논설주간이 사회를 맡았고 에스토니아·핀란드·슬로베니아 대통령이 연단에 올랐다. 메시지는 분명했다. “우리는 적과도 대화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함께 서야 할 우방이 누구인지는 더 분명해야 한다.” 이 말은 지금 한국 외교의 우선순위를 가늠하게 한다. 한국은 더 많은 상대와 대화하고 접점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 방식과 속도에서는 신중해야 한다.

주요 파트너 국가들은 북한의 우크라이나 전쟁 개입과 관련한 한국 신정부의 메시지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여러 전문가는 북한이 이제 핵만이 아닌 러시아의 전장에 참여하는 세계화된 전투 주체가 되었다고 지적하면서 한국의 전략적 입장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유럽은 북한 문제에 대한 직접 개입 여력이 부족하지만, 전통적으로 정치적 대화와 기술적 제재, 인도적 관여라는 세 갈래로 개입을 시도해 왔다. 한국이 이를 국제적 파트너십으로 묶어내는 전략이 필요하다. 하지만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을 먼저 내려줘야 한다.

중국은 가치 기반의 우방은 아니지만, 협력이 불가피한 정치·경제적 이해 파트너이자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는 인접국이기도 하다. 이미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흡입력을 높여가고 있다. 미·중 경쟁의 파고는 피할 수 없지만, 여러 차원에서 연계의 끈을 더 만들 수 있다. 거창하게 보이는 서사보다도 실질적인 접점의 확대가 유효하다. 러시아에 대한 접근은 중국보다 더 신중해야 한다. 한국에 주는 전략적 함의는 크지만, 러시아의 시장과 경제 규모는 제한적이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러·북 동맹, 그리고 제재의 문제는 한국이 주요 파트너 국가들과의 공조의 틀을 쉽게 나올 수 없게 한다. 그럼에도 대화의 가능성은 열어두는 ‘현실적 상상력’이 요구된다.

고립의 함정과 외교의 회복
탈린에서 들린 전략가들의 우려는 “한국이 스스로 고립되어선 안 된다”는 점이었다. 더는 ‘변방국’이 아닌 한국은 기대만큼 실망도 크다. 지금은 외교의 판을 갈아엎을 시기가 아니라 전략적으로 재구성할 시점이다. 그것은 과거를 부정하거나 새로운 구호를 외친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이미 갖고 있는 외교적 자산을 지켜내고 거기에 신중한 상상력을 더해야 한다.

이제 “모든 길은 워싱턴으로 통한다”는 전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북핵 문제에 외교의 모든 자원을 집중시키던 과거의 관성도 재고돼야 한다. 글로벌 사우스와의 협력, 다자주의, 그리고 인공지능(AI)·사이버·기후변화 같은 새로운 안보 의제에 대해서도 한국의 선제적 대응이 필요하다.

주요 파트너 국가들은 지금 한국을 주시하고 있다. 선택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다. 외교의 힘은 신중함과 상상력, 그리고 신뢰를 줄 수 있는 메시지 관리에서 나온다. 지금 한국이 해야 할 일은 진영을 넘고, 시대를 넘고, 새로운 질서를 상상하는 ‘인터스텔라’의 외교다. 주요 7개국(G7)에 근접했다가 어이없이 주춤해버린 한국이 새로운 신뢰를 구축하는 시험대에 올랐다. 위기는 분명 기회가 된다.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 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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