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칼럼] 한국 안보, 적극적인 발상의 대전환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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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 초 이래 6개월간 지속된 극단적인 정치 혼란의 안보 비용은 무엇일까? 북한의 도발 없이 조용히 넘어갔으니 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한국의 안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중대 변화가 진행 중인데도 우리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트럼프 행정부가 주일미군사령부의 역할을 격상해서 서태평양에서 일본 중심의 안보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지난 3월 말, 미·일 국방장관 회담 후에 “일본이 향후 서태평양에서 직면할 어떤 종류의 긴급상황에도 선두에(frontline) 설 것”이라고 말했다. 주일미군사령관을 지금의 3성 장군에서 4성 장군으로 격상하고, 주한미군사령관은 4성에서 3성으로 격하할 것이라는 말까지 돌고 있다. 이제 한국전 이후 수십 년간 주한미군이 맡아오던 동북아 안보의 주도적 역할이 주일미군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미국의 강한 요구나 미 국방부의 주한미군 4500명 감축 검토 보도에 이어 1만 명 수준으로의 감축 주장까지 나왔다. 위의 미·일 국방장관 회담에서 일본의 나카타니 겐 방위상은 “한반도, 동중국해, 남중국해를 ‘하나의 전쟁 구역’으로 통합하자”는 제안을 했고 헤그세스 국방장관도 이를 환영했다고 한다. 한국이 정치 혼란의 와중에 손도 못 쓰는 상항에서 한국의 안보 문제를 미·일 당국자끼리 논의한 셈이다.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또한 최근 싱가포르에서 열린 샹그릴라 대화(아시아 안보회의)에서 일본, 호주, 필리핀을 미국 동맹의 ‘핵심 그룹(core group)’으로 부르면서, 한국은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미국은 국내총생산(GDP) 규모에 맞먹는 29조 달러라는 엄청난 국가부채를 짊어지고 있다. 재정적자는 GDP의 6%를 넘어섰다. 트럼프 대통령이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주도해 온 미국의 리더십 역할을 버린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이러한 재정 상황이다. 이제 미국은 세계의 리더 역할을 감당할 경제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동안 미국의 보호 아래 ‘무임승차’를 해 온 동맹들이 방위비를 GDP의 5%까지 올리라고 한다. 기존의 군사전략도 최대한 선택과 집중의 방향으로 다시 짜겠다는 것이다. 결국 미국의 모든 역량을 중국과의 대결에 집중하는 ‘우선순위(prioritization)’ 전략의 구체적 내용이 오는 8월쯤 나올 미국의 ‘국가방위전략서’에 담길 예정이다.
문제는 이러한 미국의 전략이 한국의 안보에 미칠 영향이다. 북한 위협이 미국의 2차적인 관심사가 되고 주한미군의 모든 역량이 중국에 집중된다면 한국이 뒷전으로 밀리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이 다시 그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올 법하다. 북한이 핵 능력과 함께 첨단 무기들을 완성해 가면서 적대적 2국가론을 내세우고 있는 마당에 국민들의 안보 우려는 깊어질 것이다. 물론 남북 관계가 개선되어 평화 공존으로 간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시간이 걸리는 힘든 문제다.
이러한 어려움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미국이 한국에 요구하는 것은 그들이 가장 위험하게 생각하는 중국의 대만 위협에 한국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동맹답게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확실히 자기네 편에 서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만 문제에 한국이 말려 들어가는 것을 사실 원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미군이 한반도에서 북한의 위협에만 집중해 주기를 원한다. 우리 입장에서는 최선책이다. 문제는 국제 정치 현실이다. 미국이 중국과 잘 지낼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2017년 이후 중국을 최대의 적으로 규정하기 시작한 후, 외부의 안보 위협을 바라보는 한·미의 시각에는 상당한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북한 위협에만 몰두하는 입장을 고수하면 이러한 격차는 커질 것이고, 미국은 역으로 “그래, 그럼 우리는 중국에만 집중할게”라고 나올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그것은 결코 한국에 득이 안될 것이다.
미국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 지역의 안보 위협들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실제로 세상이 많이 변했다. 북·러 동맹 체결로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러시아가 참전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대만에서 미·중 충돌이 벌어지면 중국은 미군을 한국에 묶어두기 위해 북한의 도발을 원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니 동맹인 한·미가 대만 문제나 북한 위협에 대해서 통합적인 관점에서 공동으로 대처하자고 미국 측에 제안하자는 것이다.
사실 그런 방향으로의 우리 인식의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2021년 5월과 2023년 4월의 한·미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은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 유지의 중요성을 확인한 바 있다. 이재명 정부도 그러한 맥락의 연장선에서 지역 안보 위협의 통합 공동 대처의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다.
한국이 미국의 고민인 대만 문제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협력할 테니 당신네도 북한 위협과 관련하여 한국 안보에 더 적극적으로 협력해달라고 말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한·미 간의 갈등을 피하고 중요한 양국 현안들을 풀어나갈 신뢰 기반을 신속하게 마련해야 할 것이다. 적극적인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한 중대 국면이다.
윤영관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전 외교통상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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