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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통합의 세계 지도자:김대중•브란트•만델라 국제학술회의’ 축사

By 한반도평화만들기    - 23-09-13 11:47    584 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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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오신 빌리 브란트 재단의 볼프람 호펜슈테트 소장님, 넬슨 만델라 재단의 베른 해리스 대표, 행사를 준비하신 박명림 연세대 교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날 세계는 민주주의의 후퇴, 미•중 갈등 악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라는 복합적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한반도에서는 북한 핵이 날로 고도화되고 남•북, 북•미 관계가 단절된 상태입니다. 비핵 평화의 해법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 내부는 여야, 보수 진보의 진영갈등이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대화는 사라졌고 그 어떠한 정치적 합의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국내적으로는 통합, 국제적으로는 평화가 이 시대의 절실한 과제입니다. 통합을 이룬 나라만이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고 공존 번영할 수 있습니다.


오늘 20세기의 세 거인인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 독일의 빌리 브란트 총리,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의 생애와 현재적 가치를 생각하는 자리를 갖는 이유일 것입니다. 세 분은 최초의 연합 정부, 대연정, 흑백 통합 정부를 수립했습니다. 민주주의의 차원을 높였고 남북화해, 독일통일, 남아공 갈등 해소에 선구적 역할을 했습니다.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의 경계를 넘어 인류 평화에 기여했습니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한 인간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차별과 억압, 고통을 당하고도 꿋꿋하게 일어난 초인들이었습니다. 최고 지도자가 된 뒤에는 복수와 징벌 대신 용서와 화해, 공존으로 국내 통합과 세계 평화의 길을 활짝 열었습니다.


김대중과 브란트는 평생 서로를 존경하고 아꼈던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브란트는 1980년 김대중이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았을 때 구명에 앞장섰습니다. 1987년 사민당 의원 73명의 서명을 받아 김대중의 노벨평화상 추천서를 한림원에 제출했습니다. 김대중은 “나는 그에게 평생 신세만 졌다. 이북 땅에서 서로 떨어져 살았지만 어떻게 그렇게 자연스럽게 교감할 수 있었는지 돌아보면 신기할 뿐이다”라고 회고했습니다.


나치와 싸웠던 브란트는 노르웨이 망명시절 추적을 피하기 위해 본명인 ‘프람’을 버렸고 이후 브란트로 살았던 파란만장한 역경의 주인공입니다. 그러나 1966년 나치 선전부 간부 출신 키징거를 총리로 하는 독일 최초의 대연정에 참여해 부총리 겸 외무장관으로 일했습니다. 그는 동독을 고립시키기 위한, 동독과 수교한 나라와는 수교하지 않는다는 ‘할슈타인원칙’을 깼습니다. 이를 용인해 준 사람이 키징거 총리입니다. 동유럽국가와의 국가관계 개선을 위해서 유럽을 하나의 공동체로 엮고 그 속에서 선택권을 넓혀 궁극적으로 통일을 이끌어낸 원대한 구상인 동방정책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저는 공존은 생존을 위한 유일한 기회라는 브란트의 전환적 발상이 유럽과 세계역사를 바꾸었다고 믿습니다. 브란트 동방정책은 김대중 햇볕정책의 롤 모델이었습니다. 김대중은 1971년 대선에 출마하면서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을 지지하고 공감한다고 했습니다. 평화와 유리된 민족의 이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브란트처럼 무력통일을 반대했습니다. 김대중의 4대국 안전보장론와 남북한 화해평화통일론은 동북아 평화라는 거시적인 차원에서 남북 문제의 해법을 찾자는 것입니다. 세계주의자 브란트가 독일통일은 오직 유럽의 평화 질서 내에서만 생각할 수 있다고 한 논리와 같은 맥락입니다.


김대중의 동아시아 공동체 구성 제안은 브란트의 유럽공동체, 유럽연방국가 건설 제안과 유사합니다. 브란트가 나치출신 키징거와 손을 잡았듯이 김대중도 자신을 탄압했던 박정희 정권의 2인자 김종필과 연합정부를 구성했습니다. 경제 관료들은 김종필계였고 이들은 김대중 정부가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통합의 위대한 힘이라고 믿습니다. 김대중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자기를 사형시키려 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면을 건의했습니다. “내가 죽더라도 다시는 이런 정치적 보복이 없어야 한다”라고 했던 최후진술을 스스로 실천했습니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기념관 건립에  앞장서서 고문을 맡았고 200억 원을 지원했습니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했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감동적인 화해입니다.


남아프리카에서는 백인들이 점령한 뒤 340년간의 가혹한 인종차별 정책으로 300만 명 이상이 죽거나 실종되고 투옥된 흑인의 지옥이었습니다. 참상을 겪은 만델라는 폭력 무장 투쟁을 했던 강경파였습니다. 그러나 27년간의 감옥살이를 통해 용서 없이는 미래가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가 석방되고 대통령이 되자 남아공에서는 2차 세계대전 전승국의 나치 범죄자를 전원 처벌하자는 뉘른베르크 재판 방식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만델라를 정반대로 망각하지 않는 용서라는 메시지를 발신했습니다. 복수와 처단 대신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도대체 정의는 어디 있느냐라는 반발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만델라는 흔들리지 않고 흑백인종의 화해 정책을 밀고 나갔습니다. 자신을 감시하던 백인 교도관 3명을 대통령 취임식 때 귀빈석으로 초대했습니다. 자신을 법정에서 모독하고 교도소에 보낸 검사를 초대해서 오찬을 나눴습니다. 냉혹한 교도소장을 오스트리아 대사로 임명했습니다.


6년간의 감옥살이를 한 김대중은 한국의 넬슨 만델라로 불렸습니다. 만델라는 1997년 그가 네 번째로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 셋째 딸 부부를 보내 격려하고 옥중에서 내내 차고 지냈던 손목시계를 김대중에게 선물했습니다. 김대중은 유신 체제와 망명 시절 가지고 다녔던 낡은 가방을 선물했습니다. 김대중은 2005년 만델라의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을 한국어로 번역했고 책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만델라는 백인들을 양심의 교도소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용기 있는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평화와 도달하기 위한 통합은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까지 아우르는 청과 화쟁의 미덕을 발휘해야 이룰 수 있습니다. 제가 한반도평화만들기 재단과 리셋코리아라는 플랫폼을 만들고 각계 지성들과 함께 작은 노력을 기울여온 이유입니다. 김대중, 브란트, 만델라의 삶은 범부의 상상을 초월하는 용서와 화해로 통합과 평화의 축복을 선물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세상이 편협한 진영논리와 어리석은 흑백 이분법으로 어떻게 분열되고 있는지를 목도하고 있습니다. 이타적 실천으로 가득한 세 분의 삶은 위태로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성찰과 각성의 울림이 될 것입니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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